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휴전 논의에서 사실상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협상 전문가를 자처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평화 노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언에 대해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본인이 협상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금세 끝낼 수 있다며 ‘조기 종전론’을 띄웠고 실제로 취임 직후 전쟁 종식 협의에 적극 개입하면서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전날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기 종전론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모두 수용할 만한 실행 가능한 협정으로 전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푸틴 대통령은 30일간 에너지 인프라 시설 공격 중단과 전쟁포로 교환과 같이 러시아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부분만 동의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지원 중단과 이 지역 안보와 관련한 러시아의 ‘정당한 이익’ 보전이라는 종전 조건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무장 해제와 동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후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1기 때 국가안보회의(NSC) 유럽·러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피오나 힐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위원은 “푸틴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지만 트럼프에게 약간의 양보를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둘의 통화 불과 몇 시간 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은 파국을 맞았다. 가자지구 전쟁 재개는 미국이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를 공습하고 이란에 여러 차례 경고를 날린 직후 일어났다고 FT는 짚었다.
에런 데이비드 밀러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트럼프는 위대한 협상가로서 본인 이미지와 이런 분쟁의 암울한 현실을 조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며 “트럼프의 세계에서 모든 것의 중심 역할을 하는 그의 개인기는 통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협상에서 사실상 진 것이라는 평가가 잇따르는 가운데 그의 측근들은 기존 약속보다 오래 걸릴지언정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 목표는 예정대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 키스 켈로그는 엑스(X·옛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은 진정으로 말하고, 말한 대로 하는 대통령임을 증명하고 있다”며 “그는 이 전쟁을 종식으로 이끌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여러 당사국이 얽힌 전쟁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역학관계를 급변시킬 수 있다고 믿는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접근법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막스 베르크만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유럽·러시아·유라시아 국장은 “종전 협상이란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으로 비교적 수용 가능한 방안을 찾기까지 엄청난 인내와 창의력을 요한다”며 “트럼프 행정부는 그저 전쟁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핵심 동맹국들을 몰아세우느라 미국의 협상력을 스스로 떨어뜨린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한 전직 국무부 고위 관리는 “그는 우리 동맹국과 협력국들을 몰아세우는 데 더 관심을 두는데, 그러면 세계에서 우리 힘이 약해지는 것”이라며 “세계에서 힘이 약해지면 그가 원하는 거래를 못 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파 성향 미국기업연구소의 코리 샤키 외교정책·국방연구국장도 “트럼프 대통령은 빠른 승리를 얻으려는 절박함에 친구를 벌주고 적에게 상을 줌으로써 본인의 영향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등을 받치고 있는 유럽을 제치고 미국과 ‘직거래’를 이어가려 하고 있다. 전날도 크렘린궁은 “양자 모드로 우크라이나 문제 해결”을 강조했다.
유럽 주요국은 미·러 정상 통화 직후 대외적으로는 30일 인프라 휴전을 환영한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있으나 유럽 자력 방어 노력에 박차를 가하려는 모습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푸틴 대통령처럼 트럼프 대통령도 강대국의 영향권으로 나뉜 세상을 머릿속에 그리는 듯하다”며 “그럴수록 불안한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돕고 스스로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전했다.
크리스텐 미크할 에스토니아 총리는 전날 엑스에 내년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최소 5%로 늘리겠다며 “러시아는 목적과 제국주의적 야욕을 바꾸지 않았다. 이것은 유럽과 나토에 실제적 위협”이라고 적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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