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체 내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조효소 ‘플라빈(Flavin)’을 활용해 ‘근적외선 발광’을 구현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이는 기존의 적외선 발광 물질과 비교했을 때 생체 친화적이고 안정성이 높다는 특성을 갖는다. 의료 진단과 치료, 그 외 생명과학 분야에서 근적외선 활용 가능성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 결과는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지난 15일(화) 게재됐다.
자연적 형광 분자 ‘플라빈’
플라빈은 인체의 에너지 대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효소(Coenzyme)의 일종으로, 비타민 B2(리보플라빈)에서 유래한 분자다. 여러 효소가 활발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 보조 인자 역할을 하며, 지방산 산화, 아미노산 대사, 산화 스트레스 방어 등 생화학적으로 중요한 여러 경로에 관여한다.
플라빈은 이밖에 ‘형광 분자’로서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자연적으로 빛을 흡수하고 특정 파장의 형광을 방출하기 때문에, 효소 및 단백질 연구에서 ‘표지자(probe)’로 활용돼 왔다. 예를 들어, 형광 신호를 발산함으로써 플라빈이 관여하는 효소의 활성 또는 위치 변화 등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플라빈은 자연 상태에서 대부분 파란색부터 초록색 정도에 해당하는 짧은 파장의 빛을 낸다. 생물학적 센서로서는 유용하지만, 의료 진단과 같은 실용적 응용 분야에서는 다소 부족함이 있다. 짧은 파장의 빛은 조직 깊숙이 침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플라빈 파장, 근적외선까지 확장
카이스트(KAIST) 화학과 백윤정 교수 연구팀은 최근 이러한 플라빈 분자의 한계를 극복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플라빈 분자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플라빈이 내뿜는 형광 파장을 기존 청색광~녹색광 영역에서 근적외선 영역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근적외선 활용이 가능한 영역을 더욱 넓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근적외선은 비교적 파장이 긴 광선으로 꼽힌다. 파장이 길고 에너지량이 낮아 인체 조직 깊숙한 곳까지 닿을 수 있으면서도 조직 손상을 최소화한다. 이 때문에 의료 영상이나 진단, 치료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근적외선 활용 가능성은 주목도가 높다.
백윤정 교수 연구팀은 본래 3개의 고리를 갖는 플라빈의 핵심 구조를 5개의 고리로 확장했다. 여기에 산소(O)와 황(S) 같은 이종 원자를 정교하게 도입함으로써 분자의 전자 구조를 정밀하게 조절하는 새로운 합성 전략을 제시했다.
검증 결과, 황(S) 원자가 포함된 플라빈 구조체는 약 772㎚ 가량의 근적외선 영역에서도 빛을 내뿜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현재까지 보고된 플라빈 유도체 중 가장 파장이 긴 사례다.
한편, 황을 포함한 플라빈 구조체는 ‘준가역적 산화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산화-환원을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자면, 체내에서 이루어지는 항산화 작용의 효율성과 지속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연구팀은 플라빈의 분자 구조를 미세하게 조절함으로써, 빛을 어떻게 흡수하고 방출할지를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근적외선 활용 가능성 더 넓어져
근적외선은 인체 조직 투과력이 높기 때문에, 피부 아래 깊은 조직까지 도달할 수 있다. 플라빈 분자 구조를 변형해 근적외선 형광 프로브를 제작함으로써, 체내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염증 부위나 암 등의 이상 조직을 비침습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질병의 조기 진단부터 수술 중 병변 확인에도 근적외선 활용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비침습적 모니터링 가능’이라는 특성은 이밖에도 여러 방면에서 응용 가능성을 가진다. 근적외선 발광 특성을 활용해, 체내 산소 포화도, 혈류량, 대사 상태와 같은 생체 내 변화를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건강과 관련해 식품 내 유해 성분을 탐지하는 데도 응용할 수 있다. 손상을 일으키지 않고 성분 구조 등에 관해 필요한 정보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산업계에서 활용되는 ‘비파괴 검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기존에 존재하는 적외선·근적외선 치료 기술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빈은 비타민 B2의 핵심 성분이기 때문에, 인체에 대한 독성이 매우 낮다. 플라빈을 광감각제로 사용할 경우, 인공적인 물질에 비해 부작용 위험을 한층 더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카이스트 백윤정 교수는 “우리가 원하는 상황에 맞게 빛을 자유롭게 설계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앞으로 우리 손으로 원하는 색과 성질을 가진 분자를 정밀하게 설계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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