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수수께끼였던 몽골 고비사막 벽체의 건조 목적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당시 통치자들이 자원을 관리하고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할 목적으로 벽을 쌓았다고 결론 내렸다. 미국 예일대학교와 이스라엘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4일 조사 보고서를 내고 고비사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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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수수께끼였던 몽골 고비사막 벽체의 건조 목적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당시 통치자들이 자원을 관리하고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할 목적으로 벽을 쌓았다고 결론 내렸다.
미국 예일대학교와 이스라엘 예루살렘히브리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4일 조사 보고서를 내고 고비사막에 자리한 길고 긴 벽체, 일명 ‘고비의 벽’이 통치 목적의 건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총길이 321㎞나 되는 ‘고비의 벽’은 북송시대에 세력을 키운 티베트 계열 탕구트족 왕조 서하(1038~1227년)가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길게 축조한 벽체의 목적을 여러 학자들이 알아내려 했으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고비의 벽 일부 구간을 조사하는 학자들 「사진=윌리엄 허니처치」
조사에 참여한 예일대 역사학자 윌리엄 허니처치 교수는 “‘고비의 벽’은 외적을 막는 방벽이라고 생각됐지만, 최신 기술을 이용한 조사에서 서하 왕조가 자원 관리나 이동 통제, 징세 등 지역 통치의 목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어 “동아시아의 장대한 방벽은 현존하는 부분만 6259.6㎞나 되는 만리장성이 가장 유명하다. 이 장성은 진나라를 비롯한 중국 왕조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며 “이 영향으로 학자들은 ‘고비의 벽’도 방어 목적의 구조물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위성 영상 분석에 현지답사를 더해 ‘고비의 벽’을 들여다본 연구팀은 권력자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주둔지와 관소 등으로 감싼 행정 인프라임을 알아냈다. 발굴조사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19세기의 도자기, 화폐, 동물의 뼈, 나무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이런 점에서 ‘고비의 벽’은 어떠한 형태로든 유구한 시간 계속 사용됐다고 연구팀은 추측했다.
고비의 벽에서는 동물의 뼈, 나무, 동전, 도자기 조각 등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나왔다. 「사진=윌리엄 허니처치」
허니처치 교수는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과 발굴된 화폐의 조사 결과, 장벽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서하 왕조 시대일 것”이라며 “벽체 곳곳에 존재하는 주둔지는 크기는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직사각형이고 주위에 해자를 팠으며 망루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교수는 “벽체는 몽골의 척박한 자연환경에 견디기 위한 고도의 토목·건축기술이 사용됐다”며 “이렇게 완성된 긴 벽체는 자원 확보와 물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고 언급했다.
벽체 주변 환경을 고려해 수목의 위치를 시뮬레이션한 연구팀은 벽이나 주둔지가 자원의 위치를 근거로 세워진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특징을 고려하면 ‘고비의 벽’은 군사 시설이 아니라 사람의 이동과 물류를 관리하고 징세의 편의성을 높일 목적의 행정 거점이라고 연구팀은 강조했다. 중세 몽골 역사를 담은 원조비사의 서하토벌 기술 중에도 방벽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고비의 벽 안쪽에 마련된 주둔지 일부 「사진=윌리엄 허니처치」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서하는 1227년 멸망했고, ‘고비의 벽’은 이윽고 황폐해져 사막에 파묻혔다. 그 유구가 발견된 것은 수세기 후의 일인데, 여기에서는 청조 등 후대 중국 왕조의 화폐가 나와 학자들을 헷갈리게 했다.
학계는 이번 조사 결과가 몽골이나 중국 왕조에 비하면 덜 주목받는 서하에도 변방을 통치하는 고도의 노하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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