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국보 15호, 실은 백제의 선물”…1500년 봉인의 칠지도, 팩트로 깬 일본사의 허상
1500년간 봉인된 전설의 신궁, 그리고 ‘저주의 검’
2025년 현재 일본 나라현 이세 신궁, 그리고 오사카 현 이소노카미 신궁에서는 천수백 년을 넘나드는 신화·전설·비밀이 공존한다.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고대 기록에는 “일본 최초 천황 진무(神武)가 신궁에 봉헌했다”는 전설 속 ‘신의 검’이 이야깃거리로 회자되어 왔다.
이 신검이 바로 칠지도(七支刀·Shichishitō), 일본 국보 제15호로 지정된 이소노카미 신궁의 보물 중에서도 단연 신격화된 존재다. 손대면 저주가 따른다는 전설 탓에 무려 1500년간 철저히 봉인, 공개조차 금기시되었던 것이다.

1873년, 일본 역사학자 마사토모의 ‘금기 파괴’와 충격의 발견
세월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본 근대 변화의 소용돌이마저 피해가지 못했다. 1873년, 신궁 책임자이자 고고학자 하타노 마사토모(秦政知)는 천황의 공식 허가까지 얻어, 직접 문제의 신검을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수세기 먼지와 녹에 묻힌 신도의 상자. 마사토모가 꺼낸 2피트가 넘는 검은 전설 그대로, 중앙날을 중심으로 좌우 삼개씩 총 여섯 개의 가지날(생활용 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 뻗어 있었고, 이른바 ‘육차도(六差刀)’로 불렸다.
경건한 마음으로 낀 녹을 조금씩 벗기던 중, 그는 칼의 한가운데서 희미한 금빛 문자를 발견했다. 이어진 추가 조사에서, 칼날에는 뜻밖에도 중국 한자(漢字)가 금상감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금색 명문, 그 ‘팩폭’의 결정적 증거
이 금상감 명문은 일본 사학계에 폭발적 충격을 안겼다.
- “百濟□□王(백제□□왕)”
- “倭王(왜왕)”
- “辛卯年五月十六日(신묘년 오월십육일)”
(신묘년: 369년 혹은 408년 등, 백제 근초고왕 또는 근구수왕 시기와 일치) - “百鍊鋼(백련강)”
(100번 단련한 강철로 만듦) - “玆刀 百濟世子爲倭王旨造(이 검은 백제 세자가 왜왕을 위해 지어 만듦)”
- “以傳示後世(후손에게 전하여 보여라)”
이처럼 명확하게 이 칼은 백제 왕세자가 일부러 왜왕(일본국 통치자)을 위해 제작, 금칠까지 하여 정식 하사(내려줌)한 명품임을 밝혀놓았다.

일본 주장 ‘뒤집은’ 유물…실제 역사와 어떻게 다른가
1. 일본 측 주장의 내용
- 일본 사서들과 신궁 측 설명
- 왜왕(야마토 왕조)이 백제 왕에게 만들게 시켜 바치게 한 것이다.
- 백제가 왜에 예속되어 있던 증거라고 부각.
2. 칠지도 명문의 “팩트”
- 능동적 주체는 백제
- 문구에는 줄곧 “백제에서 만들어 왜왕에게 하사(선물)했다”고 기록.
- ‘예속’이 아니라, ‘제후’ 혹은 ‘동맹국 왕에게 하사한 외교 품격과 권위’를 강조.
- 기념·상징의 칼, 실전 무기 아닌 외교 제의
- 가지날 구조, 대형화된 크기는 의례용.
- 고대 동아시아 청동기·철제 의장풍습 계승.
- 제작연도와 제작자까지 명시(백제 왕세자)
- “세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문구는 십중팔구 왕실 의도와 국가적 권위 표방.
즉 칠지도 명문은 일본이 주장하는 ‘위신문화(정복 강요)’가 아니라, 오히려 ‘교류·외교권력의 호혜’였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백제-왜 관계, 칠지도로 다시 읽는다
칠지도는 한·일 고대사의 미묘한 균형을 상징한다.
- 초기 일본 왕국, 백제 등 한반도 국가들과의 외교적 의존성이 컸다.
- 백제는 철기·불교·문자 등 선진문화를 왜에 지속적으로 전파했다.
- 칠지도는 그 정치적 입증자료, 실물 유적으로 여겨진다.
문헌상, 일본서기에는 “고구려·신라·백제의 왕들이 왜에 조공했다”고 기록하지만, 오히려 백제와 왜가 동맹 또는 군신관계가 아닌 ‘독자적 왕권의 외교’ 관계임이 칠지도 유물로 증명된다.

21세기에도 불붙는 논쟁…일본 국보의 민낯
1978년 공식 일본 국보 15호로 지정된 칠지도는 지금도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에 극비 보존된다. 연 1~2회 공개되는 ‘실물 확인’은 일본 내에서도 큰 뉴스가 되고, 최근 디지털 스캔, 레플리카 제작, 학술분석이 이어지며 한일 양국 학계, 네티즌, 역사 유튜브, 방송 다큐에서 재해석이 폭발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한국 학계와 세계 사학계는 “칠지도 자체가 왜왕이 백제에 열등했음을 공식 인정하는 대목”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국내외 동아시아사, 삼국 교섭사, 고고학적 증거에서도 꾸준히 인정받고 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