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카그뉴 부대’, 에티오피아의 결단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 의사를 밝힌 아프리카 국가는 단 한 곳, 바로 에티오피아였다.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자유 진영을 지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파병을 결정했다. 에티오피아군은 정예 부대인 ‘카그뉴(Kagnew) 부대’를 1951년부터 파견했는데, 총 3,500여 명이 순환 배치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은 지평리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주요 격전지에서 미군과 함께 싸우며 단 한 명의 포로도 잡히지 않은 전설적인 부대로 기록된다. 소규모 병력이었지만 뛰어난 전투력과 강한 의지로 한국전쟁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남미 유일의 참전국, 콜롬비아
남미 대륙에서 한국전쟁에 병력을 보낸 나라는 오직 콜롬비아뿐이었다. 콜롬비아는 약 5,100명의 지상군과 해군 전력을 파병했으며, 이들은 금성 전투, 오두산 전투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또한 콜롬비아 해군은 구축함을 파견해 동해와 서해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해상 봉쇄 작전에 기여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당시 남미 국가의 직접 파병은 국제 연대의 상징적 의미가 컸다. 콜롬비아군은 전투 중 6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과 남미 간 군사적 연대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보여준다.

형제의 나라, 터키의 헌신
한국인들에게 ‘형제의 나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터키 역시 한국전쟁 참전국이다. 터키는 약 1만5천 명의 병력을 순환 파병하며 전쟁 내내 큰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50년 장진호 전투와 군우리 전투에서 미군과 함께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며 전세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터키군은 고지전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용맹을 떨쳤고,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전장을 지켰다. 이러한 활약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양국 간 특별한 우정을 이어가는 배경이 되었다.

태국, 동남아에서 가장 많은 병력 보낸 나라
동남아시아 국가 중 한국전쟁에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는 태국이었다. 태국은 약 1만1천 명의 병력을 순환 파병했으며, 해군과 공군 전력까지 함께 투입해 전방위적 지원을 했다. 지평리 전투와 철의 삼각지대 전투 등 주요 격전지에서 태국군은 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웠고, 병력 손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태국의 참전은 단순한 파병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냉전 초기 반공 전선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었고, 이는 훗날 아시아 안보 구도 속에서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그리스, 소규모지만 끝까지 지킨 전우애
유럽 남부의 그리스 역시 한국전쟁 참전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스는 약 1,200명의 지상군을 파병했고, 동시에 공군 수송부대를 투입해 전쟁 내내 병력과 물자를 나르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상군은 금성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공군은 낯선 한반도 상공에서 수많은 비행을 이어가며 병참선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병력 규모는 작았지만, 그리스군은 끝까지 전장을 지키며 국제 연대의 책임을 다했다.

필리핀, 아시아 최초의 파병국
아시아에서 한국전쟁 파병을 가장 먼저 결정한 나라는 필리핀이었다. 약 7,400명의 병력이 순환 파병되어 금성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었다.
필리핀군은 미군과 함께 철의 삼각지대를 방어하며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필리핀은 전쟁 후에도 한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가며 참전의 인연을 굳건히 다졌다. 이는 단순히 전시 지원을 넘어 오늘날 양국 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한반도의 전쟁이 아니라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충돌한 세계적 전쟁이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같은 주요 참전국은 잘 알려져 있지만,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터키, 태국, 그리스, 필리핀 같은 나라들의 이름은 종종 잊힌다. 그러나 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한국이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였다. 그들의 파병과 지원은 오늘날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