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 돌아온 복수의 특공대장
첫 성공 이후, 이진삼 대위는 경계가 더욱 치열해진 북쪽을 상대로 또 한 번 승부수를 띄운다. 같은 침투 루트를 따라 2주 뒤 북한군 대대장까지 직접 목표로 삼았으나, 경계 강화 탓에 최종 암살엔 실패한다. 하지만 특공대는 위장·매복·순간 교전에서 단 한 건의 사상 없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다. 이 작전은 단순 정보 수집이 아니라,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남한의 답변, 즉 “눈에는 눈, 총에는 총”이라는 실질적 보복 행위였다.

임진강 들판에서의 최후 사격
1967년 10월 18일, 마지막 작전에서 이진삼과 팀은 침투 경로를 강원도에서 경기도 임진강으로 변경한다. 이들은 북한의 689 GP를 급습, 수류탄 8발을 던져 적군 20명과 군사 장비 50여 점을 파괴한다. 처절했던 이 작전에서 특공대는 무사 귀환했으나, 전향공비 한 명이 전사하는 현실도 마주하게 된다. 세 차례에 걸친 임무에서 이진삼 대위와 대원들은 총 33명의 북한군을 제거하는 기록을 남겼다.

최고지도부에 보고, 전설된 북파 영웅
성공은 곧장 청와대까지 보고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를 위한 결단과 용기”라며 금일봉을 직접 수여했고, 이진삼은 이후 대한민국 북파 공작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40여 년간 군사기밀이었지만, 2008년 국방부 국정감사 등을 통해 일부 문서가 공개되며 그 존재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단순한 첩보가 아닌 ‘실전 응징’
이진삼 대위의 침투 작전은 정보 수집이나 정찰을 넘어 직접 암살·파괴를 수행한, 한국전쟁 이후 전무후무한 ‘보복 응징’ 사례로 남는다. 그의 실제 현장 리더십과 특공술, 실전 무술은 오늘날까지 후배들에게 ‘작지만 매운 고추’라는 상징적 별명을 남겼다. 이후 그는 간첩·공비 사건 해결과 야전 지휘관으로서 군에 큰 족적을 남겼고, 육군참모총장과 국회의원으로도 국가 안보 중심에 서게 됐다.

남북관계 변화의 단초가 된 작전
이 진삼 대위의 작전은 북한에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상시적인 북침 능력과 전략적 유연성”이 있음을 보여준 이 사건은 한편 더 큰 도발과 역풍, 청와대 근방 침투 사건 같은 후속 파장도 낳았다. 남북 긴장이 다시 고조되는 지금, 그의 기록은 단순한 전사(戰士) 아닌 전략적 리더십과 위기 대응력의 상징으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 북파 응징의 실전 역사가 한국 안보의 원칙과 현실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그 유산은 오늘도 국가 위기 대응의 핵심 사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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