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광학기업 니콘(Nikon)이 실적 회복을 위해 중국 시장 개척에 사활을 걸었다. 2024년, 니콘은 25년 만에 신제품을 출시한다. 중국 수출 규제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성숙한 기술을 갖춘 노광 장비다.
노광 공정은 미세 반도체 공정의 핵심이다. 그 공정을 실현하는 노광 장비를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반도체의 노광 공정에 왜 카메라로 유명한 니콘이 등장하는 걸까.
반도체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회로가 많으면 많을수록 훨씬 복잡하고 수준 높은 연산이 가능해진다. 이 회로를 아주 좁은 공간에 조밀하게 새기는 것이 노광(Lithography·리소그래피)공정이다. 미세한 전자회로를 반도체 웨이퍼에 조 단위로 새기기 위해서는 바늘로도 부족해 ‘빛’을 활용해야 하는데, 빛을 활용해 사진을 찍듯 회로도를 찍어내는 이 공정에 광학 기술이 활용된다. 미세 반도체 공정이 요구되지 않던 시절 니콘과 캐논은 이 분야의 선두였다.
노광 공정은 이 회로 간 간격을 좁혀 궁극적으로 성능은 높으면서 아주 작은 크기의 반도체를 구현해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현 시점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곳이 바로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인 ASML이다. 1984년 등장한 ASML은 각각 1917년, 1937년 설립한 니콘, 캐논을 따돌리고 세계 선두가 됐다. ASML은 모두가 ‘늦었다’ ‘불가능하다’고 의심하던 시절부터 렌즈 생산 기업, 레이저 장비 기업과 손잡고 초격차 기술 개발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2018년 ASML은 오직 자사만 생산할 수 있는 극자외선(EUV·Extreme Ultra Violet) 노광 장비 양산에 성공했다. ASML의 극자외선 노광 장비는 기존의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와 비교해 다루기가 훨씬 까다롭다. 극자외선은 쏘기만 해도 금방 공기 중에 흡수되거나 렌즈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 ASML과 협력한 세계 최고의 렌즈 기업과 레이저 기업의 기술이 켜켜이 쌓이며 불가능은 가능이 됐다. 특히 10나노(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생산에 ASML의 극자외선 노광 장비가 필수라 일류 반도체 기업들은 1년에 50대만 생산이 가능하고, 대당 가격이 2000억 원을 훌쩍 넘는 이 장비를 손꼽아 기다린다. 중국은 반도체 장비 수출 제재로 줄을 설 수도 없다.
1990년대까지 인텔 등에 노광 장비를 판매하며 업계를 장악했던 니콘은 ASML의 등장 이후 만년 업계 2, 3위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니콘은 2016년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사업부 구조조정 이후 상용화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니콘 역시 극자외선 노광 장비 기술력은 일정 보유하고 있지만 상용화가 가능한 수준의 가격 경쟁력을 갖추지 못해 ASML은 커녕 캐논과의 격차도 좁히지 못하고 있다. 미쓰비시 UFJ 모건스탠리증권의 조사에 따르면 2022년 노광 장비 매출 기준 세계 시장점유율 1위는 ASML(62%), 2위는 캐논(31%), 니콘은 7%로 3위에 머물렀다.
니콘은 중국의 위기를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다. 니콘은 성숙한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노광 장비를 2024년 여름에 출시할 예정이다. 1990년대 초에 전력 및 통신 반도체, MEMS 등 다양한 장치를 제조하는 데 사용되며 실용화됐던 ‘아이라인(I-line)’이라는 구세대 광원 기술을 활용했다. 내구성이 요구되는 전력 반도체 제조에 적합하며, 일반 전자 부품 등을 사용해 가격도 캐논보다 20~30% 정도 저렴하게 책정될 전망이다.
니콘의 NSR-2205iL1 5x reduction i-line stepper
일본 정부는 미국의 대중국 통제에 발맞춰 2023년 7월부터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 수출 통제 대상에 포함했다. 중국 기업들은 최첨단 장비를 해외에서 구매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전력반도체 등 비첨단 제품으로 생산라인을 바꾸고 있다. 모든 전자 기기에 고성능 반도체만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DUV 노광장비는 EUV 같은 최첨단 기술은 아니지만, 자동차나 스마트폰, PC, 로봇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보편적인 기술이다.
니콘의 아이라인은 실용화된 지 25년이 지난 구세대 장비로 대중국 수출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실용화된 장비는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만, 니콘은 비첨단 반도체 생산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장비 성능을 다운그레이드했다. 하마타니 마사토 니콘 정밀기계사업부장은 니혼케이자이신문을 통해 “경제산업성(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과 협의 중이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중국에 적극적으로 판매하겠다”고 말했다.
니콘은 2023년 회계연도(2024년 3월 마감)의 연결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22% 감소한 350억엔(약 3037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올해 회계연도에는 정밀 기계 사업 부진이 전체 순이익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업그레이드가 아닌 다운그레이드라는 역발상으로 중국의 문을 두드리려는 니콘이 시장점유율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차이나랩 임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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