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뿐 아니라 오컬트 장르는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매니아적인 측면이 강해 일부가 좋아하는 장르죠.
이번에 <파묘>가 천 만관객까지 바라보면서 오컬트 영화가 함께 주목 받는 듯합니다.
자연스럽게 한국 오컬트 영화에서 파묘 이전에 가장 성공한 곡성도 다시 주목받네요.
당시에 ‘뭐시 중한디’는 완전히 유행어처럼 되었죠.
예전에 썼던 리뷰 다시 한 번 꺼내 보았습니다. ^^
영화의 출발은 두개로 나눈다. 예술 영역에서 출발한 영화와 상업목적으로 출발한 영화다. 예술 영역은 문학작품의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했다. 상업영화는 프로파간다를 비롯한 다양한 목적성을 의도하며 발전했다. 시간이 지나며 각자 고유의 영역을 지키며 발전했다. 1960년대부터 예술 영화라는 영역은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며 1980년대 말에 정점을 찍는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은 다양한 예술영화를 발전시켰다.
사람들에게 칭송받은 예술영화를 보지 않으면 어딘지 영화를 본다는 이야기를 차마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헐리우드 영화나 보는 사람은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놈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남을 의식하는 놈이였기에 그런 영화를 제법 찾아보기도 했는데 솔직히 지루했다. 템포는 느리고 화면은 정지화면처럼 움직임의 변화가 없었다. <블루> <화이트> <레드>의 키에슬로브스키, <노스텔지어>의 타르콥스키 영화를 졸면서 보던 기억이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지루하긴 했지만 무엇인가 남기도 했고 괜히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예술 영화라는 관점은 다소 무의미해졌다. 이건 단순히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전체적인 측면이 그렇다. 이제는 예술과 상업의 영역이 모호해졌다. 무엇보다 자본의 논리가 득세하며 관객에게 배제당하는 영화는 힘들다. 평론가들의 힘이 클 땐 그나마 이들의 한 마디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평론가의 평론을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조롱받는 경우도 생겼다. 이제 예술 영화라도 – 문학작품이라도 – 어느 정도 재미가 보장되어야한다.
과거에는 <여인의 음모(브라질)>같은 테리 길리엄감독이 만든 의식흐름에 따른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쓰고보니 그런 영화가 맞나하는 의구심이 든다만) 이제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같은 영화가 관객의 사랑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면서 예술영화를 대치하는 시대가 되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영화가 나올때만 해도 2000년은 돌아오지 않을 시대처럼 느꼈다. 너무 머나먼 미래라 생각했고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세상이 될 것이라 다들 판단했다.
1900년대에 이미 생각이 고정되어 2000년대라는 이미지를 어느 누구도 그리지 못했다. 1990년대 말이 되면서 갈수록 묵시록적인 영화와 작품들이 탄생을 했다.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상당히 신비성이 있었고. 이제 2016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에서 나왔던 미래는 여전히 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게 묵시록은 유행처럼 지나갔다. 사람들은 점점 본질에도 관심없고 영혼에도 관심없다. 그저 재미있으면 된다고나 할까.
그렇다. 쓸데없이 지금까지 <곡성>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사족이 더 길었다. 정작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급마무리 할 것같은 뉘앙스다. 영화 시작과 함께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분명히 한국영화인데 21세가 폭스라는 외국 영화제작사 타이틀이 뜨는 것과 성경구절이 나온다는 점이다. 내용은 어찌 의심하느냐 너희가 나를 꼭 만져야만 믿겠느냐는 내용이다. 영화는 분명히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만 들려주는 매체다. 이걸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감독이 영화 시작하자마자 보여준 이유가 분명히 있다. 영화 3분의 2까지 진행되어도 솔직히 영화 시작하자마자 나온 성경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전혀 몰랐다. 심지어 도대체 영화가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도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 이 영화는 철저하게 상업영화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었기에 굳이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 더구나 영화 중간까지는 분명히 심각한 장면과 상황과 연기를 하지만 웃겼다.
같이 영화를 본 사람이 ‘감독이 미쳤다’고 했다. 데뷔작인 <추격자>는 재미있게 봤지만 <황해>는 봐야지 하면서 못 보다가 케이블에서 할 때마다도 놓치고 이 영화를 본 점이 내 경우에는 실수다. 정확하게 나홍진 감독의 영화를 계속봤어야 <곡성>영화가 이어질 듯 한 느낌마저 든다. <추격자>를 떠올리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번 <곡성>은 솔직히 잘 몰랐다. 실제 지명인줄. 찾아보니 전라도에 있는 실제 지명이라 다소 놀랐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해하리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오컬트영화라고 깨달았다. 그렇다해도 그 어떤 CG도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연기자들의 연기와 상황으로 극을 몰아간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호불호가 상당히 강할 것이라 판단된다. 솔직히 이 영화가 이런 영화인지 알았다면 영화를 보면서 좀 더 꼼꼼하게 봤을 것이다. 영화가 계속해서 여러가지 메타포를 숨겨놓는다. 그걸 캐치하지 못했다. 의식의 흐름까지는 아니라도 중간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들이 연결된다. 다소 의아했는데 영화를 다 보니 이해는 된다.
영화 내용이 전개되면서 상황, 상황에 웃기도 하고 보기는 했지만 계속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은 도대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였다. 깨 부시는 영화도 아니고 오컬트를 표방했지만 그런 쪽으로 더이상 나가지도 않고 굳이 이야기하자면 딸을 어떻게하든 살리겠다는 아빠의 집념정도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각 출연자들마저도 어떤 캐릭터로 이 영화에서 비중과 역할을 차지하는지 마저 솔직히 애매했다. 그나마 딸 효진역할의 김환희는 역할을 씹어먹는다. 다른 배우들이 연기를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연기는 다들 아주 아주 훌륭하다.
대부분 아이는 건드리지 않는다.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영화들은 아이들을 건드리는 영화다. 설마 아이가 그럴리는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어른들이다. 아이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할 때 경악하게 된다. 오컬트 영화중 <오멘>과 <엑소시스트>가 더욱 인상깊고 소름끼쳤던 이유다. 마지막 20분 정도를 남겨놓고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내용의 의미가 펼쳐진다. 자연스럽게 앞 내용을 복기해야하는데 멍하니 봤더니 놓쳤다. 그런 이유때문에 다시 보면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며 보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한다.
쓰다보니 점점 장황해진다. 마지막에는 베드로의 닭이 세번 울기전 너는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는 은유도 나온다. 처음 나온 성경구절인 봐야 믿는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저지른 죄악이 업보가 되고 권선징악이 된다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만. 한편으로는 감독이 각본까지 썼는데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연결도 느껴졌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여러 의미와 생각을 던져주려 노력하지 않았나하는 내 생각자체가 엉뚱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될 수 있는 한 영화 내용과 판단은 <곡성>을 본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라 – 원래 영화내용과 책 내용은 잘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는 스타일이지만 –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슬래셔무비 장르도 혼합되어 있어 심호흡을 좀 하고 봐야 할 영화다. 일본 배우인 쿠니무라 준은 정말로 악전고투했을 듯 하다. 박수쳐주고 싶은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였다. 곽도원은 영화 중심을 잡고 주연배우로 잘 이끌어 주었고. 황정민은 솔직히 살짝 아쉬웠다. 첫 장면등에서 좀 더 분위기를 전환시켰으면 했는데 아마도 연출의 문제였겠지.
더 길게 쓸수도 있을 듯 한데 논란이 될 영화일듯도 하다. 여하튼 은근히 다른 사람들의 영화평과 한줄 평등이 상당히 궁금해지는 영화다. 다들 눈치보며 무엇이라 해야하는지 영화 끝나고 망설인다고 할까. 많은 사람들이 관심갖고 있는 영화니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제일 좋다. 난 확인했다. 참, 사운드가 죽이는 극장에서 볼 것을 권해준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걸 느꼈다. 참,,,, 러닝타임 150분이 넘는데 시간은 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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