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터뷰!) 영화 <리볼버>의 오승욱 감독을 만나다
‘리볼버’는 비리 경찰 ‘수영(전도연)’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대가로 꿈에 그리던 아파트 입주와 돈을 약속받고 복역했지만. 2년 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자 자신의 몫을 향해 전진하는 영화다. 그 과정에서 속내를 알 수 없는 ‘윤선(임지연)’과 약속한 돈과 얽힌 ‘앤디(지창욱)’를 만나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2015년 ‘무뢰한’ 이후 전도연 배우와 10년 만의 조우다. 2000년 ‘킬리만자로’로 데뷔해 세 번째 작품을 선보인 오승욱 감독을 지난 8월 1일 삼청동의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무뢰한’때 함께했던 제작진이 대부분 합류해 만족도 높은 팀워크를 보여주었다고 거듭 감사함을 표했다. ‘오승욱표 영화’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제작진이 의기투합한 기대도 커 보였다.
‘초록물고기'(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이재수의 난'(1999)의 시나리오 작가로 오래 활동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60대지만 오승욱 감독을 만나보니, 순수하고 솔직한 소년미가 흐르고 있었다. 스태프가 오승욱의 팬으로 구성된 탓에 시너지가 터졌던 현장이기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북적이기 마련이다. 차분하고 자상한 리더십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제작 시간을 조금만 앞당겨 줄 수 없냐는 주문이 쇄도하자, “힘내보겠다”는 말로 화답해 웃음이 피어났다.
느릴지 몰라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
-전작 ‘무뢰한’ 이후 10여 년 만에 신작이 나왔다.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싶은 팬도 전도연이며, 전도연의 추진력으로 성사된 영화가 ‘리볼버’란 말을 들었다. 차기작 텀이 길어진 이유가 궁금하다.
“준비하고 있었던 게 엎어지는 일도 있었고, 새로운 걸 시작하는 데 오래 걸리는 이유도 있다. 쓰다가 막히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방향을 잃거나 했던 거다. 다행히 도연 씨를 만나서 4년 만에 시작할 수 있었다.
도연 씨랑 수영을 만들어 가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나리오를 다 읽더니 ‘감독님 글은 다 읽고 나면 술 먹고 싶어요. 꽁치에 소주 먹고 싶어요’라고 감상평을 해주었는데 그게 마지막 장면이 되어버렸다. 카메라를 그저 들이대고만 있으면 될 정도로 배우의 연기에 의존했다. 전반적으로 제가 쓴 무뚝뚝한 글을 읽고 배우, 카메라, 미술 감독 등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이미지를 근사치로 구현해 주니까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 복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그저 저는 방해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스태프의 관심과 존경이 유난히 컸던 현장이라 생각해도 되나. ‘오승욱표 영화’, ‘오승욱 같은 영화’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나.
“스스로 내 영화는 이렇다고 정의하는 게 맞나 싶지만.. (웃음) 예전에 합을 맞춘 스태프와 오랜만에 작업하게 되니까. 다들 저한테 잘해주려고 더 신경 쓴 게 느껴졌다.
스태프들이 해준 말을 종합해 보면 ‘뒤틀림’이 아닐까 싶다. 캐릭터 표현 방식도 그렇고 장르를 아예 뒤틀어 버리는 거다. 박자를 빠르게 하거나, 이상한 말을 내뱉는 상황 등. 모서리를 좋아해 주는 것 같다. 수영과 앤디가 처음 만나는 술집 장면 중 앞뒤 전후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촬영, 편집 등에 신경 썼다”
-범죄,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장르지만 마냥 어둡고 잔혹하지만은 않다. 전작들과 비교할 때 블랙 코미디적 상황도 가미되어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톤이 변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처음부터 도연 씨를 생각하고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읽고 도연 씨가 판타지 같다며 당황해하기도 했고, ‘무뢰한’이 너무 끔찍하게 끝나기도 해서 조금 가볍게 가보자고 결정했다.
명확하게 설정한 한 건 존재감 없는 투명 인간 하수영이 마지막에 가서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완성되는 승리였으면 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하수영의 승리지만 씁쓸함도 생긴다. 한 마디로 한 뭉치의 돈과 몸을 누일 수 있는 한 뼘의 방을 쟁취하는 이야기다. ”
-초반 캐릭터 빌드업과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숏폼처럼 짧거나 도파민 터지는 자극적인 영상을 자주 보는 젊은 층을 잡기 위한 장치가 있을까.
“우리 영화는 ‘최후의 증인'(1980)에 빚을 진 영화다. 한국의 이상한 지역과 사람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후반부에 모든 것이 휘몰아치는 절정으로 가기 위해 기초를 탄탄히 쌓아 올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액션만으로는 정보를 전달할 수 없었고 연기나 분위기로 가져가야만 했다. 고전을 다시 보면서도 느낀 건데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호흡을 유지하기 힘들겠다 생각했다.
‘킬리만자로’는 잔혹해서 웃어야 할지 고민되지만 ‘리볼버’는 가볍게 웃었으면 했다. 앤디가 수영을 잡으려고 데려온 패거리가 아마추어같이 보이고, 한 번도 휠체어를 밀어보지 못한 사람이 자갈밭 위에서 하이힐을 신고 밀어야 한다. 여담인데 그때 전혜진 씨 구두가 돌에 박혀서 찢겼다. 그레이스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와서 겪는 품위의 박살이다. 강남의 고층 빌딩만 전전하던 사람이 깊은 산속에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고, 우쭐해하는 형사가 절에서 황당한 짓을 하기도 한다. 코미디 영화를 원한 건 아니지만 약간의 웃음이 유발되도록 장치했다”
하수영이 투명 인간에서
실존 인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하수영’이란 인물이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잔혹한 관정을 겪고 마지막에 가서 품격이 완성된다. 경찰이지만 그다지 경찰처럼 느껴지지 않는 스타일도 인상적이다.
“하수영은 형사지만 경찰 내부보다는 강남 대기업이나 클럽이 익숙한 인물이다. 경찰청 방송국에서 홍보 아나운서로 일하게 되면서 그쪽 사람들을 만나 물들어갔고, 염치도 잃어버린, 타락한 사람이다. 임 과장과 대화 중에 ‘클럽에서 마약 파티 한두 번 한 것도 아니잖아’라는 말투만 봐도 범죄에 무뎌진 거다.
그래서 과거 장면을 어떻게 보여주고 넣을지도 고민이 많았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스타일을 유지했던 하수영이 모든 것을 약속받고 감옥에 복역하면서 툭하고 모든 게 단절된다. 교도소 생활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을 거다. 출소해 보니 아무도 찾지 않는, 무두가 등 돌리는 사람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차근차근 품위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죄를 지었고 보상을 꿈꾸며 미래를 꿈꿨는데 그게 없는 상황. 과거의 인연이 총을 쥐여 주는 거다. 가져가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니 버리지도 못하는 거다.
총이 있지만 쓰지 않고 해결한 방법을 찾다가 삼단봉을 집어 드는 거다. 그때 하수영이 품위가 지켜진다. 살인은 저지르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신념, 품격을 유지하게 된다. 도연 씨가 이를 잘 이해하고 연기해 주었다”
-검도 기반 액션이 신선했다. 캐릭터의 전사와도 연결되면서도 삼단봉을 휘두르는 카리스마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경찰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 상대방과 싸울 수 있는 액션 중 유도와 검도 중 고민했다. 유도는 영화적으로 자신이 없었는데 검도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 것 같았다. 민기연(정재영)의 괴팍함과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청렴결백, 대나무처럼 꼿꼿 검객이 시한부가 되면 어떨까. 꼬일 대로 꼬여버린 과대망상은 어떨지 상상해 봤다. <킬리만자로>, <무뢰한>때도 삼단봉 액션을 좋아해서 매료되었던 것도 있고, 도연 씨가 휘두르는 삼단봉도 멋있을 것 같아 선택했다”
-전도연 배우는 ‘무뢰한’ 이후 두 번째 호흡을 맞추었다. 전작과 10년 정도의 텀이 있다. 달라진 점이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나.
“더 깊어졌고 넉넉해졌고 애교도 늘었다. 촬영장에서는 선장처럼 행동했다. 모든 스태프가 전도연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한 테이크 더 가려고 하면 왜 또 찍냐면서 스태프의 편에 섰다. 그들의 노고를 해소해 주는 말과 행동을 하니까 다들 좋아하더라. 영화에서는 스스로 조여가면서 연기하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일타 스캔들]에서 밝고 경쾌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좋더라”
-속내를 알 수 없는 기회주의자 정윤선 역의 임지연, 허술하고 지질한 안타고니스트 앤디 역의 지창욱을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지연 씨는 ‘더 글로리’, ‘인간중독’에서 좋게 봤다. 우리 영화에서는 안 보여준 모습으로 나왔으면 했다. 윤선은 ‘로빈’ 같은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배트맨을 힘들게 하는 캐릭터라고. 2대 로빈은 죽으면서 죄의식을 심어주지 않나. 윤선이 그런 캐릭터이길 바랐다.
수영과 주종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로 설정했다. 멋대로 해주었으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첫 장면에서 기적처럼 차 문을 열고 나오는데 머리카락이 바람이 날리는 거다. 배우의 아우라에 감탄했다. 임 과장이 준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도 압도당했다. 남자 하나를 그냥 뭉개 버리는 상황도 재미있게 연출되었다.
앤디는 강남의 술집이나 회의 장소에서는 대단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었겠지만 권력, 신뢰, 돈을 잃어버려 투명 인간이 되었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아등바등 하나 자승자박이고, 무시당하기 십상인 거다. 창욱 씨는 ‘조작된 도시’에서 봤고 남성적인 외모도 마음에 들었다. 창욱 씨가 앤디 역을 맡아 주면서 원래의 비중을 뛰어넘어 버렸다. 얼굴, 몸짓 모든 게 존재감이 커져 버렸다. 술집에서 수영에게 맞아 활처럼 휘어지는 동작, 수영을 기다리며 휠체어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 때 한 번 더 움직여 준 몸짓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너무 신나서 여기서부터 속초 앞바다까지 업고 간다고 할 정도였다”
-임 과장(이정재)은 하수영이 움직이는 동력이자 모든 사건과 얽혀있다. 임 과장이 자석처럼 여러 인물과 끌림을 유발한다. 기자간담회 때 한재덕 대표가 함께한 술자리에서 캐스팅 불발된 배우 대신 본인이 자처하면서 합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가 날 수 있는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이 정재 씨다. ‘이재수의 난’ 때 인연(오승욱은 작가, 이정재는 배우)이 있었고, 이후 ‘킬리만자로’로 대종상 영화제 때 호텔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알게 된 사이고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로서 이제야 일을 하게 된 기쁜 조우다. 감독으로서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도 신기하고 서로의 팬이 된 상황도 재미있다”
-앤디, 그레이스라는 외국 이름을 쓴 특별한 이유가 있나.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 황정미는 맥거핀으로 설정한 건가.
“둘은 원래 한국 이름이었는데 바꾸었다. 그레이스 전사를 생각해 봤을 때 홍콩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쓰는 영어 이름 중에서 ‘그레이스 켈리’를 떠올려서 그레이스로 결정했다. 그레이스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어릴 때 한국에서 모델 일을 하다가 중국에 진출했다는 설정이다. 혜진 씨를 처음 본 건 여균동 감독의 ‘죽이는 이야기'(1998)다. 선풍기 바람을 가로지르는 등장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레이스의 격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앤디는 ‘앤드류 가필드’를 떠올렸고, 황정미는 맥거핀이 맞다”
-전작부터 반복되는 비정한 범죄 세계를 고집하고 있다. 믿음과 배신이 지배하는 누아르, 피카레스크, 하드보일드 장르를 계속해서 만드는 이유가 궁금하다.
“어렸을 때 각인된 작품을 돌이켜 보니, 하나의 세포 같은 문학, 만화 작품들이 있었다.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조지프 콘래드 ‘로드 짐’, 카지와라 잇키의 만화 ‘타이거 마스크’, ‘내일의 조’에서 영향 받았다.
죄를 지으면 신의는 가장 먼저 파괴된다. 죄인이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기 위한 저의 근간인 거다. 이거 하나만이라도 파고들자, 잘 다뤘으면 하는 바람이다. 60대이지만 다음 영화에서는 더 잘하고만 싶다. 범죄 영화를 계속하고 싶은 의도와도 맞닿는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안 그려본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다뤄보고 싶은 야망이 있다. 이번에는 인간이 가장 취약한 부분과 우스꽝스러움, 슬픔을 표현해 봤다. 그게 마지막 장면에서 다 보이는 거다”
글: 장혜령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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