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안 배우’의 반전 이력, 우현의 대학 시절
우현(1964년생)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유쾌하고 가벼운 감초 역할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배우다. 하지만 그의 밝은 이미지 뒤에는 누구보다 치열했던 청춘의 기록이 숨겨져 있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우현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는 총학생회 집행부로서,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과 49재를 이끌었으며, 영결식 당시 태극기를 들고 최전방에 선 모습은 미국 시사잡지에도 실릴 만큼 상징적이었다.

옥살이 두 번, 그리고 군 복무의 꿈을 접다
우현은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두 차례 감옥에 수감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원래 군 복무에 대한 열망이 있었으나, 전과로 인해 군 입대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1987년 항쟁에서 최선봉에 섰지만, 이후 내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회상한다. 당시의 치열함과 두려움, 그리고 동지들과의 우정은 지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절로 남아 있다.

영화 ‘1987’에서 완전히 반대편 인물을 연기하다
우현은 영화 ‘1987’에 출연하며,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민주화 운동의 반대편에 선 인물, 치안본부장(경찰청장에 해당)을 맡았다. 학생운동의 최전방에 섰던 그가, 극 중에서는 진실을 은폐하려는 권력의 상징을 연기한 셈이다. 우현은 “배우로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밖에 없었다”며, 연기자로서의 소명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영화 속 시위 장면을 보며 “30년 만에 다시 보니, 내가 그때 외면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고 밝혔다.

금수저 출신, 그러나 정의를 택한 청춘
우현의 아버지는 병원장이었고,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그의 선택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금수저로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돼 있었지만, 정의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그의 신념은 지금도 많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감초 배우, 그리고 진정한 정의의 사나이
우현은 이후 배우로서 감초 역할로 자주 등장하며,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동시에 작품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모습은 정의와 용기를 실천한 행동가였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헌신, 그리고 옥살이까지 감수한 그의 용기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나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라며 영웅담을 부담스러워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요약
- 우현은 가볍고 까불거리는 이미지의 인기 배우이자,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한 정의로운 인물이다.
- 연세대 총학생회 집행부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두 차례 옥살이를 겪었다.
- 유복한 가정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며, 군 복무는 하지 못했다.
- 배우로서는 ‘1987’에서 치안본부장 강민창 역 등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며, 진정성 있는 연기와 삶으로 존경받고 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