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전 폭발 속, 외교관들은 동행했다
1991년 1월, 소말리아 내전이 격화되며 수도 모가디슈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한국과 북한의 대사관 역시 그 중심에 있었고, 양측 외교관들과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 탈출을 준비해야 했다. 북한 대사관은 이미 수차례 무장 강도와 약탈을 당한 상태였고, 결국 북측 외교관들은 한국 대사관의 강신성 대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한국 외교진은 망설임 없이 북측 인사들을 관저로 받아들였다. 탈출을 위한 협력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례적인 상황 속에서 남북 외교관들은 국적과 이념을 떠나 같은 공간에서 생존을 도모하며 일시적인 ‘동지’가 되었다.

하나의 비행기, 하나의 운명
이탈리아 대사관이 제공한 군용기를 통해 탈출이 가능해졌지만, 좌석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 대사관 인원만 탑승하기로 했지만, 강 대사는 북한 외교관들의 동승을 요청했다. 이에 이탈리아 측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를 수용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도심을 벗어나 공항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검문소가 막아선 아비규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 인원 중 한 명은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남은 모두는 극적으로 활주로에 도착했고, 마침내 같은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밥을 함께 나눈 남북, 공포 속의 연대
한국 관저에 머무는 동안 남북 외교관들과 그 가족들은 한 공간에서 함께 먹고 자며, 긴장된 시간 속에서도 인간적인 교류를 나눴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불확실한 내일을 대비하는 데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북측 인사들 역시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직된 태도는 누그러졌고, 비상상황 속에서 자연스러운 연대감이 형성됐다. 이는 정치적인 대화나 외교 협상이 아닌, 생존과 공감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었다
2021년 영화 ‘모가디슈’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지만, 실제 상황은 영화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영화에서는 북한 측이 먼저 찾아오는 설정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대사가 먼저 구조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다.
탈출 여정에는 정전으로 인한 혼란, 무장세력의 위협, 공항 접근 중 벌어진 총격까지 다양한 위기가 있었고, 이런 일련의 상황을 남북이 함께 견디며 탈출을 완수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은 매우 크다.

한 사람의 결단, 하나의 인도주의
이 사건은 단지 외교사에서 보기 드문 일화가 아니라, 분단된 한반도에서 희귀하게 실현된 인간 중심의 연대이자 실천이었다. 정치와 이념이 아닌, 생명을 위한 연대가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강신성 대사의 결단은 외교적 수완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로 인해 남북 모두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국경과 체제를 넘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보편적 가치를 확인시켜준 순간이었다.

위기 속에서 확인된 남북 협력의 가능성
소말리아 모가디슈 탈출 사건은 단순한 피난극이 아니라, 분단된 한반도에서 가능한 협력의 단초를 보여준 사례였다. 외교관이라는 신분 이전에 인간으로서 보여준 연대와 배려는, 오늘날 남북 관계에도 큰 울림을 준다.
극단의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협력이지만, 바로 그 순간이기에 더 진정성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암시하는 작은 이정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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