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3대 패션 학교를 졸업한 디자이너의 도전과 추락
한국인 최초로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를 졸업한 황재근. 그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브랜드 론칭과 패션쇼, 청담동 쇼룸 오픈 등 화려한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패션쇼, 사무실, 쇼룸 운영 등 사업에 필요한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고, 카드 대출과 보험 대출까지 동원했지만 옷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뉴욕, 홍콩, 싱가포르, 이탈리아 등 해외 진출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연이어 실패했다. 결국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부도에 이르렀고, 극심한 빚 독촉에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할 만큼 절망적인 시기를 겪었다.

가면 디자이너로의 전환, ‘복면가왕’이 가져온 인생의 반전
절망의 끝에서 황재근이 붙잡은 것은 ‘가면’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가면 제작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6~7년간 1,000개가 넘는 가면을 만들며, MBC ‘복면가왕’의 가면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이 작업을 계기로 다양한 방송, 행사, 광고, 디자인 컬래버레이션 등에서 러브콜이 이어졌고, 들어오는 수입마다 빚을 갚으며 마침내 모든 채무를 청산했다. 가면을 통해 얻은 유명세와 일거리는 황재근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었고, 그는 다시 패션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패션에 대한 DNA, 어머니와의 특별한 인연
황재근의 패션 DNA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 역시 결혼 전 패션 디자이너였고, 옷에 대한 철학과 멋을 자식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했다. 황재근은 어린 시절, 늘 멋진 옷을 입혀주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는 정말 멋쟁이셨다”고 회상했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유학의 기회를 얻을 만큼 사랑을 받았던 그는, 어머니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슬픔과 후회
유학 시절, 어머니의 위독 소식을 들은 황재근은 당장 비행기 표를 살 돈이 없어 절망했다. 생활비 100만 원으로 근근이 버티던 그에게 비행기 왕복 표는 200~300만 원에 달하는 큰돈이었다. 결국 일본인 동급생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돈을 빌려 한국에 돌아왔지만, 시차와 여러 사정으로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사진만 남아 있었고, 그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 경험은 황재근에게 평생의 아픔과 후회로 남았다.

아픈 과거를 딛고, 화려한 삶을 꿈꾸다
사업 실패와 가족의 상실, 빚과 고통을 딛고 황재근은 다시 일어섰다. 최근 방송을 통해 공개된 그의 집은 입구부터 금빛으로 꾸며져 있었고, 주방과 침실에는 100년, 200년 된 프랑스·영국산 가구와 소품들이 가득했다. 그는 “일반 가정집처럼 사는 걸 싫어한다. 집이 갤러리 같고 카페 같은 공간이 좋다”고 밝혔다. 인테리어와 재료, 잔공사에만 1억 원을 들였고, 골드 컬러와 유럽 왕실의 바로크 스타일을 선호해 문을 열면 마치 중세시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방아쇠수지증후군과의 싸움, 그리고 멈추지 않는 열정
황재근은 최근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는 ‘방아쇠수지증후군’으로 고통받고 있다. 직업적 과사용이 원인으로, 가위질을 많이 하는 디자이너에게 흔한 질환이다. 그는 “손가락이 아파서 디자인을 조금 놓게 됐다. 하지만 손에서 절대 놓지 마라,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디자이너로서 영원하고 싶다”며, 다시 패션쇼와 컬렉션, 세일즈에 도전할 계획임을 밝혔다.

황재근의 메시지,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
황재근은 자신의 삶을 통해 실패와 절망, 그리고 재기의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줬다. 그는 “내 디자인 철학은 이 손가락에 있다. 손이 아파도,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다짐했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가면, 그리고 패션에 대한 집념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애쓰는지 보여준다. 앞으로도 황재근은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며, 새로운 도전과 재기에 나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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