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초한 ‘상어급’ 잠수함과 26명의 침투병력
1996년 9월 18일 새벽 1시 30분,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북한 상어급 잠수함이 좌초되며, 정찰·암살 임무를 띤 무장공비 26명이 해안으로 침투했다. 함장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의 **김동원 대좌(당시 공화국 영웅)**로, 침투 목적은 대통령·주요 요인의 암살과 정찰이었다.

침투와 첫 교전 – 49일간의 작전 돌입
잠수함 좌초 직후, 한국군과 경찰, 예비군, 해군, 공군 등 28개 부대가 투입돼 49일간의 대대적 소탕작전을 펼쳤다. 평균 일일 병력은 4만 2,000명, 연인원 전투인원은 150만 명에 달했다. 교전 결과 공비 25명은 사살·자살, 1명(이광수)만 생포됐다.

이광수, 계획은 수류탄처럼 무너졌다
당초 26명은 잠수함 복귀·정찰·암살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함정은 암초에 걸려 무력화, 작전은 실패로 전락했다. 식량과 무장을 분배받은 침투병들은 산골 민가로 흩어졌으며, 그중 이광수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

산골 마을 민가에서의 긴박한 순간
이광수는 굶주림으로 민가에 내려갔다가 마주친 한 부부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부인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 2명이 M1 카빈 소총을 들고 출동했다. 권총을 꺼내려던 이광수는 경찰에게 “손 들어, 움직이면 쏜다!” 경고를 받고 제압당했다.

생포와 전향 – 대한민국의 정보 자산으로
그가 체포됨으로써, 침투 목적, 병력 수, 신원을 모두 파악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작전의 결정적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 이광수는 전향했고, 1997년 해군에 입대해 교육사령부 정훈 교관으로 활동하며 재교육하는 길을 택했다.

피해 규모 – 민·군·경 교전의 참혹함
작전 결과 공비 25명은 사살 또는 자살, 생포 1명, 아군 측은 군인 12명·경찰 1명·예비군 1명·민간인 4명 등 18명이 사망, 27명이 부상했다. 민간 피해 복구액은 약 2,000억 원으로 추정됐다.

잠수함, 무기류, 장비 노획 4,380점
한국군은 잠수함과 공비들이 소지한 무기, 탄약, 통신 장비 등을 포함해 총 4,380점의 장비를 노획했다. 여기에는 RPG-7, AK 소총, 수류탄, 난수표, 카메라 등 다양한 정찰·전투 장비가 포함됐다.

이광수의 심경 변화와 보안 경계
생포 후 1년 뒤 기자회견에서 이광수는 북한의 선전과 달리 현실은 다르다며, 동료에 대한 안타까움과 잠수함 침투는 여전히 진행 중일 것이라는 경각심을 나타냈다. 경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대한민국 안보 의식 제고에 기여했다.

작전 이후 개선된 방어 체계
사건 이후 대한민국은 군 경계망, 해양·육상·항공 연계 작전, 예비군 대비 태세를 강화했다. 해군 1함대와 23사단(신설) 전력 보강, 특전사·예비군 통합 훈련 등으로 보안망을 재정비했다.

단 한 명의 생환이 가져온 교훈
1996년 강릉 침투 사건은 북한의 수단과도 같은 정찰·암살 시나리오를 입증했다. 26명 중 단 한 명만 살아남은 작전의 실패는, 우리 안보와 경계 능력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생포된 이광수는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 자신의 경험을 교육자라는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며, 실제 교훈을 전달하는 살아있는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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