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에서 무속인으로, 그리고 20년째 기러기 아빠…정호근의 인생 2막
연기파 배우에서 무속인으로, 인생의 대전환
정호근은 1983년 MBC 공채 17기로 데뷔한 후 30여 년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 배우다. ‘야인시대’, ‘다모’, ‘이산’, ‘선덕여왕’ 등 굵직한 작품에서 악역과 조연을 오가며 깊은 존재감을 남겼다.
동료 배우들 사이에서도 연기력과 인품 모두 존경받는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2013년, 그는 오랜 무병과 가족사를 겪은 끝에 신내림을 받고 무속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배우로서의 성공 뒤에는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두 자녀를 잃는 비극과 계속되는 건강 이상,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고민이 그를 신내림의 길로 이끌었다. “내가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액운이 간다고 하더라”는 말에, 그는 결국 무속인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 이 선택은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인생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과의 이별, 그리고 20년째 이어지는 기러기 아빠 생활
신내림을 받은 이후, 정호근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가장 뼈아픈 변화는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아내와 자녀들은 미국에 머물며, 그는 한국에서 홀로 신당을 지키는 ‘기러기 아빠’가 됐다. 이 생활도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가장 힘든 건 기러기 아빠 생활”이라고 고백할 만큼, 가족과의 분리는 그의 삶에 큰 외로움과 그리움을 남겼다.

그는 “힘들 때는 가족 생각이 많이 난다. 옆에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고, 아내가 다리를 주물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1년에 한 번 정도 가족을 만난다는 그는, 오랜 세월 혼자 식사를 해결하며 “10년 동안 라면만 먹었다. 이제는 밀가루 냄새만 맡아도 힘들다”고 말했다. 신당에서는 직원들이 식사를 챙겨주지만, 입이 짧아 한 번 먹은 반찬은 다시 먹지 못한다고 한다.

신내림 이후 불거진 가족 갈등과 이혼 위기
무속인이 되기로 결심한 뒤, 가족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아내는 “마음대로 결정할 거면 혼자 살라”며 이혼을 통보했다. 정호근은 “신내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삶에 대한 의지가 사라졌는데, 자식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회상했다. 이혼 통보 후 20일 만에 아내로부터 “생각이 짧았다. 미안하다”는 연락을 받으며 위기를 넘겼지만, 부부는 여전히 따로 살고 있다.
정호근은 “미국에 있는 아내는 저와 떨어져 지내는 게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세 끼 반찬이 다 달라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면에는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다.

하루 40명 상담, 무속인으로서의 바쁜 일상과 책임감
배우에서 무속인으로 전향한 이후, 정호근은 하루 대부분을 신당에서 보낸다. 많을 때는 하루에 40명씩 상담을 하기도 했다. “연기할 때보다 에너지 소모가 훨씬 크다”며,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영적으로 기운을 나누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토로했다. 그는 “힘든 이야기만 듣고 사니 삶이 지친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무속인으로서의 삶은 단순히 굿이나 점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상담가에 가깝게, 일상의 언어로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위로를 건넨다”고 말한다. 무속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자신만의 소신을 이어가고 있다.

동료와의 단절, 그리고 다시 꿈꾸는 연기
신내림 이후, 동료 배우들과의 관계도 급격히 멀어졌다. “종교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다 끊겼다. 홍해 갈라지듯 (동료들이) 없어지고 허허벌판에 홀로 서있더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젠가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다.
무속인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그는 여전히 배우로서의 자부심과 열정을 잃지 않았다. “연기는 내 인생의 일부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카메라 앞에 서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사명과 희망
정호근의 인생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깊은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사명감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배우로서, 무속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아버지로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20년의 세월, 수많은 상담과 위로의 시간, 그리고 다시 꿈꾸는 연기의 무대까지. 그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고비에서 선택과 용기, 그리고 희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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