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형의 그늘에서 독립한 35세 청년, 라면으로 승부수를 던지다
울산의 가난한 10남매 중 셋째였던 신춘호. 그는 형 신격호의 뒤를 따라 일본 유학 후, 롯데의 설립을 도우며 전무, 무역부장, 일본롯데 이사까지 올랐다.

그러나 1965년, 35세였던 그는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돈 500만 원으로 신대방동에 조그만 라면 공장을 세우며 독립을 선언한다. 당시 형 신격호는 “라면은 이미 끝난 시장”이라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신춘호는 “맛과 품질로 승부하겠다”며 결단을 내렸다.
📌 라면 사업을 독자적으로 시작하며 형과의 갈등은 본격화됐다

⚔ “롯데 이름 쓰지 마라” 형제의 의절, 농심의 시작
설립 초기 회사 이름은 ‘롯데공업’. 형의 그늘 아래 시작했지만, 1978년 결국 상호를 ‘농심’으로 바꾸게 된다. 이는 단순한 상호 변경이 아니라, 형제 관계의 단절을 상징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이후 다시는 함께 하지 않았고, 농심과 롯데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 사명 변경과 함께 형제는 의절하고 농심은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 “라면은 과학이다” 스프부터 면발까지 품질로 밀어붙이다
신춘호는 창업과 동시에 ‘라면연구소’를 세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투자였다. “스프는 화학이지만, 맛은 과학”이라며 연구개발(R&D)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이 전략은 1970년 ‘소고기라면’으로 첫 성과를 낳는다.
이후 ‘짜파게티’, ‘새우깡’, ‘안성탕면’ 등도 R&D 중심 전략에서 탄생했다.
📌 농심의 무기는 언제나 품질과 기술력이라는 철학이었다

🔥 신라면의 탄생, 성과도 이름도 ‘辛’으로 승부
1986년, 농심은 사상 최대 히트작인 ‘신라면’을 출시한다. ‘매울 신(辛)’ 자를 활용해 제품의 매운맛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신춘호의 ‘신’도 담았다. 브랜드 자체가 곧 회장의 이름이자 정체성이 된 것이다.
신라면은 해외 수출에서도 성공하며 “세계 어디서나 신라면을 보이게 하라”는 신 회장의 전략을 실현시켰다.
📌 신라면은 국내외를 장악한 브랜드이자 신춘호의 상징이 되었다

🌎 IMF에서도 매출 1조,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업
1997년 외환위기,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던 시기에도 농심은 저가 식품 수요 증가로 오히려 도약한다. 이 시기 라면은 ‘생존의 음식’이 되었고, 농심은 그 중심에 있었다. 이 해를 기점으로 농심은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 IMF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는 국민 식탁의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 끝내 풀지 못한 갈등, 2세들이 이어가는 두 제국의 길
2020년 신격호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신춘호는 조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신춘호 역시 별세했다. 끝내 화해하지 못한 두 형제의 이야기는 한국 재계사에 오랫동안 회자된다.
현재 농심은 장남 신동원이, 롯데는 신동빈 회장이 각각 이끌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룹을 확장 중이다. 2세 경영 아래 농심은 생수, 프리미엄 라면, 건강식 등 신사업에 도전하고 있으며, ‘매운맛의 세계화’라는 기치도 여전히 유효하다.
📌 두 형제는 떠났지만, 각자의 철학은 여전히 후계자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 마무리 요약
- 신춘호는 형 신격호의 반대를 무릅쓰고 500만 원으로 농심을 창업
- 라면 연구소를 세우고 R&D에 집중해 ‘소고기라면’, ‘짜파게티’, ‘신라면’ 등 성공
- 브랜드 철학은 ‘품질’, ‘매운맛’, ‘한국의 맛 고수’
- IMF 위기에도 매출 1조 달성하며 흔들림 없는 성장
- 형제는 화해하지 못했지만, 농심은 2세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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