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병 투병 중에도 법정과 현장을 지킨, 방송인 출신 변호사 고 이종은의 명과 암
화려했던 1990년대, CF 스타와 아나운서에서 시작된 비범함
199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 CF모델의 대표주자, 그리고 SBS ‘모닝와이드’의 안정적인 MC로 이름을 알렸던 한 인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출신이라는 이력과 더불어, 약 20여 개의 TV 광고와 시사·생활 프로그램 진행자로 당당하게 방송가를 누볐던 이종은의 이력은 지금 돌이켜봐도 눈부시다.

특유의 이국적이고 지적인 이미지로 대형 브랜드의 메인 모델로 발탁됐으며, 이계진 아나운서와 함께 아침 시사 쇼를 이끌던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미디어 세계에서 잠정 은퇴를 선언하며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한국 사회가 IMF와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으로 요동칠 때, 그는 연예인의 명예와 자리에서 자연스레 물러났다.

결혼 이후, 미국 유학과 변호사로서의 새 도전
결혼 후 그의 길은 다시 한 번 열렸다. 미국행을 택한 이종은은 베냐민 N. 카도조 로스쿨(JD)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오랜 집중 끝에 2003년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뉴욕 대형 로펌인 DLA Piper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며 국제 법률 시장에서 실력을 키웠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국내 최고 로펌인 김앤장에서 외국변호사로 활약했다.
이후 그는 국제 비즈니스, 해외 진출, M&A, 상사 분쟁 등 다양한 회사법 분야에서 역량을 인정받았다. 한국·미국 양국의 실무 경험은, 아시아를 넘어 중동, 유럽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중동 진출, 한국계 여성 전문가의 선구자
이종은은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을 택한다. 2012년, 아랍에미리트(UAE) 최대 로펌인 알타미미(Al Tamimi)의 한국 총괄 파트너 변호사로 합류한 것. 아부다비와 두바이, 카타르, 사우디 등 걸프 지역에 진출하는 한국 대기업과 스타트업, 금융기관, 그리고 한류 비즈니스의 법률·상사 자문을 도맡았다.
이 종은은 현지 아랍 문화권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익힌 언어·교섭력, 그리고 세계 각국을 오가며 쌓은 ‘다문화 감각’으로 동·서양을 잇는 법률가로 존재감을 넓혔다. 한국계 여성이 중동 현지 대형 로펌의 파트너까지 오르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그가 남긴 족적은 법조계 내에서도 매우 상징적이었다.

유방암 투병, 그리고 무너지지 않은 마지막 3년
2015년, 이종은은 예기치 못한 고통을 마주한다. 유방암 판정. 그러나 초기 발견 뒤 적극적인 치료로 건강을 상당 부분 회복했고, 한동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 현장에 복귀했다.
한국-중동-아시아 각지에서 계약과 중재, 비즈니스 미팅과 법정 출석을 계속 이어갔다. 아픈 중에도 그는 늘 “나는 괜찮다”, “내가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말을 힘 있게 남겼다. 그저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닌, 직업인의 소명과 동료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하지만 2017년 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마지막까지 회사 회의에 참석했고, 업무 지시와 동료 지원, 고객 관리까지 직접 챙겼다. 마지막 일주일에도 정상적으로 로펌에 출근했다는 동료의 증언은, 한 명의 어른이 보여준 책임감의 실체다.

2018년 7월 아부다비에서의 마지막, 그리고 영면
2018년 7월 18일, UAE 아부다비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이 아닌 이국 땅, 바로 그가 가장 오래 머물며 몸 바쳤던 그 현지에서였다. 본인의 유언에 따라 이슬람식 절차로 현지 모스크에서 장례가 치러졌고, 아부다비 현지에 영면하게 되었다.
이종은은 장례 직전까지 “회사와 동료, 고객들 모두에게 소홀함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고, 그의 동생은 “언니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맡았던 일, 사람, 약속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다”고 전했다.

남겨진 것들, 그리고 여성 전문직 롤모델로서의 의미
이종은은 생전 한 차례 결혼했고, 13세 아들과 어머니를 유족으로 남겼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도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이종은은 사망 2년 전 무슬림으로 종교를 바꿔 신앙에도 큰 의미를 두고 살았다.
2018년 여름 갑작스러운 부고는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오늘까지 그의 삶을 기억하는 많은 후배, 동료, 가족들은 그가 남긴 뚜렷한 ‘직업인의 태도’와 ‘삶의 존엄성’을 깊이 되새긴다.
한때는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얼굴, MC와 CF 스타의 우상이었던 젊은 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법정, 사무실, 국제 무대에서 또 다른 이름으로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삶.
철저한 자기관리와 다시 일어서는 용기, 그 끝에는 변호사로, 방송인으로, 한 가족의 엄마로 사명을 다하려 했던 한 인간이 있었다.
오늘 7주기를 맞으며, 고 이종은의 삶과 죽음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진짜 어른’의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여성 리더상 그 자체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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