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끝, 최초 미국 대통령 찾다 – “아이젠하워 환영 실탄 예포” 사상 초유의 국빈 의전
냉전 최전선 한반도, 사상 첫 미국 대통령이 내리다
1960년 6월,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외교 이벤트를 맞이한다. 6.25전쟁이 끝난 지 채 7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 세계 초강대국의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공식 방문하게 된 것이다.
한강변이 폭격의 재만 남아있고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에 긴장감이 감돌던 시기, 아이젠하워의 방한은 단순한 외교를 넘어, 한민족 전체에게 “우리를 지키는 세계”가 찾아온 초현실적 순간이었다.

“100만 인파 운집” – 서울이 멈췄던 그날의 열기
당시 서울의 인구는 200만 명 남짓. 그런데 아이젠하워의 방문을 보기 위해 남녀노소 불문, 시내에 100만 명 넘는 시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 사람들은 앞다투어 밖으로 나가 도로를 메웠고, 심지어 전봇대와 간판, 2층집 지붕, 그리고 조선 전통의 숭례문 지붕 위에까지 몸을 올릴 정도였다.
- 환호성과 성조기 물결, “아이젠하워 만세” 팻말, 직접 만든 축하 꽃다발이 시내를 뒤덮었다.
이 역사적 대우는 미 언론사로부터 “작은 민주주의의 기적”, 외신 기자들에게는 “서울 전체가 아이젠하워를 위해 살아 움직였다”는 극찬을 받았다.
전설의 의전: “실탄 예포 21발” – 포병의 순정, 외교의 극한
방한 마지막 일정, 아이젠하워는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의 사열식을 참관하기로 돼 있었다. 국군 포병부대는 대통령에게 최고의 예우를 표하고 싶어, 조촐한 군악·사열만으론 아쉽던 차에 “외국 정상(군주) 의전에서 21발의 예포(※ 보통 공포)를 쏘는 게 예의”임을 알게 된다.
포병 대대장들은 가장 장엄한 인상을 남기겠다며, 의전 예포를 준비하는데, 당장 ‘훈련용 화약 공포탄’이 없다 보니, 그냥 105mm 야포 실탄을 장전해둔다.

아이젠하워의 차량이 사열로를 지나갈 때
- 대대장은 “최고의 예우를 보여드리자”며 차를 세우고, 장병들에게 ‘발사’를 명령.
- 쾅!쾅!… 21발에 달하는 105mm 포탄이 실제로 하늘을 가르며 마치 대전투가 시작된 듯 발사된다.
- 이 포탄들은 미리 인적 없는 한강변 지대로 각도·방향을 맞춰 발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의전을 넘어선 충심, 위기와 웃음 끝 교차
- 정식 절차나 경호 협의 없이 실탄을 바로 쏘았다는 사실에 대통령 경호팀이 경악.
- 미군 측은 잠시 굳어 있었으나, 아이젠하워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환영을 받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 “아름답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terrifying) 의전이었다”는 말도 남겨, 본인도 진심어린 감동과 당혹을 동시에 표했다는 후문.
- 뒤늦게 유엔·미군사령부는 한국군의 ‘직진식 성정’과 “좋은 의도만을 담은 실수”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왜 이토록 극단적 환대를 보냈나 –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남은 날
아이젠하워에 대한 국민적 열광의 뿌리
- 6.25전쟁 시절 한국에 투입된 UN군 전체의 최고 실질 지휘관(당시 유럽연합군사령관)
- 미국의 압도적 군수·물자·병력 지원, 휴전 직전 대규모 원조와 구호 식량, 의복, 병원선·포로 송환 등 전후 재건의 ‘약속된 미래’ 제공
- 전쟁고아·실향민뿐 아니라 도시 빈민·중산층까지 “아이젠하워=구세주”라는 인식
- 미국의 ‘국가 공식 감사 사절단’을 서울 시민이 직접 체험하는 첫 대사건

의전도, 집단감정도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되다
1960년 한국, 전쟁의 폐허에서 구겨진 국격과 민생이 회복되던 바로 그 해, 아이젠하워를 환영한다며 실탄포로 하늘을 울린 나라.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보여준 집단적 충성, 전야의 감동, 그리고 한미동맹의 미래 약속에 남긴 ‘잊히지 않는 전설’이 됐다.
아찔한 실탄 예포조차도, 그저 위험하고 어설픈 해프닝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젊은 나라가 동맹에게 줄 수 있었던 최선의 환대와 신념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울림은 오늘의 동맹,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로까지, 두고두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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