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글로벌 방산업계, 혼자 멈춘 英BAE
전 세계가 지정학적 위기와 전쟁 장기화로 국방비를 증액하는 가운데, 주요 방산업체들은 각국과 굵직한 무기 계약을 잇달아 체결하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한국 방산기업들 역시 유럽과 중동 시장에서 대형 계약을 연이어 성사시키며 승승장구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영국의 대표 방산기업 BAE 시스템즈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했다. 최근 영국 랭커셔주 워튼(Wharton) 공장의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 조립라인 가동 중단을 공식 발표하며 업계 안팎에 충격을 줬다.
신규 주문 ‘제로’, 멈춰버린 생산 라인
BAE 시스템즈에 따르면 워튼 공장의 타이푼 최종 조립은 카타르 공군에 인도될 마지막 기체를 끝으로 중단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신규 주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2009년 이후 단 한 대의 타이푼 신규 기체도 발주하지 않았다.
반면 독일·스페인·이탈리아는 자국 공군용 생산을 이어가고 있으며, 유럽 컨소시엄은 연간 생산량을 14대에서 20대로 늘릴 계획이다. 이로 인해 영국은 타이푼 컨소시엄의 핵심 조립국에서 부품 하청기지로 사실상 위상이 낮아지게 됐다.
하청기지로 전락한 英 조립공장
영국은 컨소시엄에서 완전히 빠지지는 않는다. 전방 동체와 같은 핵심 부품 생산은 계속하지만, 최종 조립은 유럽 대륙으로 보내야 한다. 이 변화는 영국 노동조합과 야당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수천 개의 고급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고, 수십 년간 축적된 전투기 최종 조립 노하우가 유실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국이 주도하는 6세대 전투기 개발 사업인 ‘글로벌 전투 항공 프로그램(GCAP)’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美 F-35 선택이 부른 ‘아이러니’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영국 국방부의 전략적 결정이 있다. 영국은 타이푼 대신 미국 록히드마틴의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우선시했다. 최근에는 무장 탑재가 가능한 버전을 포함해 F-35 27대를 추가 구매할 계획을 발표했다.
국방부는 “5세대 스텔스 전투기는 현대전에 필수”라는 입장이지만, 비판론자들은 “영국만이 컨소시엄 참여국 중 최신형 타이푼을 자국 공군용으로 발주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로 인해 자국 산업 기반을 약화시키면서까지 미국산 전투기에 의존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정치권·노조의 강한 반발
노동조합과 야당은 이번 결정을 “워싱턴과의 특별한 관계를 위해 영국의 핵심 산업을 희생한 행위”로 규정했다. 이들은 정부가 타이푼 신규 주문을 통해 자국 조립라인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산업 기반 유지와 고용 안정, 기술 보존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존 힐리 국방장관 또한 “타이푼은 2040년대까지 영국 방공의 핵심 전력으로 남을 것”이라며 최소한의 신규 발주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정부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하며 구체적 계획은 밝히지 않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와 마지막 희망
현재 BAE 시스템즈와 영국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등과의 타이푼 수출 계약 성사를 마지막 희망으로 걸고 있다. 최근 영국이 독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튀르키예에 대한 타이푼 판매를 지지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유로파이터 컨소시엄은 신규 수출 계약이 체결되면 연간 최대 30대까지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밝혔지만, 워튼 공장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건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멈춰버린 현재의 생산 라인이다. 글로벌 방산업계가 호황을 맞이하는 가운데, 영국 방산의 상징적 공장이 멈춘 이번 사태는 전략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뼈아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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