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단풍이 내려앉은 골짜기. 그 안엔 누군가의 땀과 기도가 스며든 길이 있습니다.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는 그저 단풍이 아름다운 산책지가 아닙니다.
조선의 첫 신학생들이 신앙을 지켜낸 자리이자, 순교와 헌신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국 천주교의 심장부’이기도 하죠.
배 밑바닥 같은 마을

‘배론’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치 배의 밑바닥처럼 움푹 들어간 모양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좁은 입구와 깊숙한 안쪽 지형은 외부에서 한눈에 보이지 않아,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기 좋은 천연 요새였습니다.
이곳에는 국내 최초의 신학당인 성요셉 신학교, 황사영 백서 토굴,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해 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길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남긴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 사제였고, 평생을 걸어서 복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1년에 2,800km 이상을 걸으며 신자들을 찾아갔고, 박해 속에서도 신분제 폐지와 사회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과로와 장티푸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길 위에는 ‘땀의 순교자’라는 이름이 남았습니다.
2016년 교황청은 그를 ‘가경자’로 선포했죠. 지금 배론성지를 걷는 다는 건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 걷는 일과 같습니다.
황사영 백서, 반역으로 기록된 순교의 글

황사영은 젊은 시절 과거에 급제했던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권력보다 신앙을 택했고, 박해 속에서 토굴에 숨어 백서를 쓰게됩니다. 62cm × 38cm 크기의 비단 조각 위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13,000여 글자.
그 안엔 신앙의 자유를 위한 절규와 더불어 외세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지만, 백서는 지금도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풍 진 돌계단 아래 조용히 자리한 ‘황사영 토굴’에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가을의 바람은 마치 누군가의 숨결처럼 다가옵니다.
순교의 땅에 물든 단풍길

10월 중순에서 11월 초, 배론성지는 단풍으로 불타오릅니다. 신학당 주변의 단풍나무와 느티나무들이 붉게 물들며, 순교의 이야기를 품은 돌담길과 어우러지는데요.
특히 최양업 신부 묘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조용히 걷기 좋은 단풍 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음 하나 없는 고요한 공기 속에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마치 오래된 기도처럼 들리죠.
올가을 단풍 여행 계획을 잡지 않았다면 배론성지에서 천주교 이야기와 함께하는 것은 어떨까요?
✔체크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운영시간: 10:00-17:00
단풍 절정 시기: 10월 말~11월 초
관람 소요 시간: 약 1시간
주차 가능 / 입장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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