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공동취재단
1세대 연극 배우 향년 69세로 별세
한국 연극계의 커다란 별 이자, 무대 위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배우 윤석화가 19일 오전, 69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2년여에 걸친 뇌종양 투병 기간에도 마지막까지 예술가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고인은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오전의 혼란 딛고 전해진 비보
19일 오전, 연극계와 언론가는 한차례 혼선에 휩싸였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한국 연극배우협회 등을 통해 고인의 별세 소식이 흘러나왔으나, 공식적인 발표가 늦어지며 한때 ‘사망 오보’로 혼선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보는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연극계와 유족에 따르면 윤석화는 이날 오전 9시 50분(혹은 10시경)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고인은 지난 2022년 7월 연극 ‘햄릿’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직후, 영국 출장 중 갑작스럽게 쓰러지며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수술을 거치며 병마와 싸워왔으나, 끝내 다시 무대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예술 동지들과 팬들의 곁을 떠나게 됐습니다.
1975년 시작된 50년의 연기
1956년생인 윤석화는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하며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단숨에 관객을 압도했는데요. 그녀는 손숙, 박정자와 함께 1980~90년대 ‘연극계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며 한국 연극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작품은 단연 ‘신의 아그네스’입니다. 1983년 초연 당시 그녀는 아그네스 수녀 역을 맡았고 순수함과 광기를 오가는 그녀의 연기는 ‘윤석화가 곧 아그네스’라는 찬사를 이끌어냈고, 이 작품은 그녀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됐습니다.
또한 ‘딸에게 보내는 편지’(1992)를 통해서는 1인 극의 정수를 보여줬고, ‘마스터 클래스’(1998)에서는 전설적인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로 분해 완벽한 캐릭터 변신을 선보였습니다. 환갑의 나이에 도전했던 2016년 ‘햄릿’의 오필리어 역은, 나이라는 장벽조차 예술적 열정 앞에서는 무의미함을 증명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CM송 가수부터 발행인까지
대중에게는 연극배우로 가장 잘 알려졌지만, 윤석화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무대 데뷔 초기에는 청아하고 맑은 음색으로 수많은 광고 음악(CM송)을 불러 ‘CM송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는데요. 오란씨, 쥬시후레쉬 등 당시 내로라하는 광고의 노래들이 모두 그녀의 목소리에서 탄생했습니다.
뮤지컬 무대에서도 그녀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아가씨와 건달들’, ‘사의 찬미’, 그리고 창작 뮤지컬의 자존심 ‘명성황후’ 등에서 주연을 맡아 한국 뮤지컬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했는데요. 영화 ‘사의 찬미’와 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 등 매체를 넘나드는 활동은 그녀의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어 1999년 경영난에 처한 월간지 ‘객석’을 인수해 발행인으로서 문화 예술계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대학로에 소극장 ‘정미소’를 운영하며 후배 연극인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한국 연극인 복지 재단 등을 통해 동료 예술인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선 연극계의 큰 언니이기도 했습니다.
항암치료 거부와 자연치유
뇌종양 수술 이후 그녀는 독한 항암치료 대신 자연치유를 선택했습니다 치료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변화로 인해 삶의 질이 무너지는 것보다, 남은 시간을 배우 윤석화답게, 인간 윤석화답게 보내고 싶다는 결단이었는데요.
그녀는 투병 중이던 지난해 한 방송에 출연해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고 싶다”라며 “쑥뜸을 뜨고 자연 속에서 지내며 삶을 정리하고 있다”라는 근황을 밝혀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무대를 향한 그리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2023년 10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열린 연극 ‘토카타’ 공연에 5분 남짓 짧게 우정 출연했던 장면은, 그녀가 관객과 나눈 마지막 약속이자 작별 인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동료들
현재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 1호실에 마련된 빈소에는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동료 연극인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상주로는 남편 김석기 씨와 아들 수민 씨, 딸 수화 씨가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 연극인 복지 재단 길해연 이사장은 “선생님은 한국 연극의 자부심이자 기둥이었다”라며 “그분이 남긴 예술적 자산과 연극인들을 향한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슬픔을 전했습니다.
고 윤석화의 입관은 20일 오전 8시에 진행되며, 발인은 21일 오전 9시에 엄수될 예정입니다. 장지는 경기 용인공원 아너스톤으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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