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 개요]
생성형 AI 붐의 다음 챕터로 현실 세계의 기계를 움직이는 ‘피지컬 AI’가 급부상하고 있다. 산업용 로봇 강국인 일본에서는 야스카와전기와 파낙이 엔비디아(NVIDIA)와의 협력을 강화하며 AI 로봇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로봇 제어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Mujin은 208억 엔(약 1,890억원) 규모의 대규모 자금조달에 성공하며 로봇 공통 플랫폼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장에 축적된 정밀 데이터와 신뢰도 높은 공급망을 앞세워 일본 기업들이 ‘물리 세계의 OS’를 둘러싼 새로운 산업 패권 경쟁의 전면에 떠오르고 있다.
2023년에서 2024년에 걸쳐 세계는 ChatGPT로 대표되는 생성 AI 열풍에 휩싸였다. 텍스트와 이미지, 동영상을 생성하는 AI는 막대한 투자 자금을 끌어들이며 관련 기업들의 기업가치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하지만 2025년 하반기 이후 투자자들의 관심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스크린 안의 AI에서 현실의 물체를 움직이는 AI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피지컬 AI(Physical AI)’다.
AI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물류 창고에서 짐을 분류하며, 공장의 생산 라인을 스스로 제어하는 장면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자동화는 단순한 소프트웨어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로봇과 센서, 제어 기술 같은 물리 인프라가 필수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30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일본 제조업이 역설적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 일본 기업들이 ‘현실 세계를 움직이는 AI’ 경쟁의 핵심 플레이어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카와전기와 파낙, 그리고 신흥 로봇 소프트웨어 기업 Mujin까지. 이들 기업에 대규모 자금이 몰리는 흐름은 단순한 경기 사이클이 아니라, AI가 현실 세계를 제어할 ‘손과 발’을 일본에 기대고 있다는 신호다.
●목차
Mujin – ‘로봇 산업의 Windows’를 노리다
피지컬 AI 투자 열기를 상징하는 사례가 로봇 제어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Mujin이다.
이 회사는 2025년 NTT 등을 대상으로 한 제3자 배정 증자를 통해 208억 엔(약 1,89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다. 일본 로봇 스타트업 가운데서는 이례적인 대형 투자다.
Mujin의 핵심 경쟁력은 특정 로봇 제조사에 종속되지 않는 공통 제어 소프트웨어다.
현재 산업용 로봇은 제조사마다 서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여러 제조사의 로봇을 하나의 생산 라인이나 물류 시스템에서 동시에 운용하려면 막대한 개발 비용이 들어간다.
Mujin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물류 창고나 공장에서 서로 다른 회사의 로봇을 하나의 시스템에서 통합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 회사가 노리는 것은 ‘로봇 산업의 Windows’다.
로봇 엔지니어 아다치 유스케는 이렇게 설명한다.
“로봇 산업의 진짜 병목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입니다. 로봇을 지능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공통 OS를 장악한 기업은 결국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Mujin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그 기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하드웨어가 범용화되는 시대에 부가가치의 중심이 제어 소프트웨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208억 엔 투자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야스카와전기 – ‘로봇 제조사’에서 ‘AI 인프라 기업’으로
상장 기업 가운데 피지컬 AI 테마로 가장 주목받는 곳은 야스카와전기다.
이 회사의 주가는 최근 반년 동안 크게 상승했고, 해외 투자자의 매수세도 눈에 띄게 늘었다. 배경에는 단순한 로봇 제조사를 넘어 AI 인프라 기업으로 변신하려는 전략이 있다.
야스카와전기는 2023년 엔비디아 GPU를 탑재한 산업용 로봇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이후 소프트뱅크와 협력해 물류와 자산 관리를 통합한 기업용 시스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또 미국 위스콘신주에 약 290억 엔(약 2,636억 원)을 투입해 AI 로봇 전용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목표 가동 시점은 2029년이다.
이 공장은 단순한 생산 거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미·중 갈등 속에서 공급망 분리가 진행되는 상황을 고려한 전략적 투자다.
미국에서는 정부 조달을 중심으로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이 강화되면서 자국 생산 로봇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한 대형 증권사 산업기계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평가한다.
“야스카와전기는 더 이상 단순한 모터 기업이 아닙니다. AI를 결합한 로봇을 중심으로 공장 전체의 자동화 인프라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보는 것은 바로 이 ‘AI 인프라 기업’으로서의 성장성입니다.”
파낙 – 엔비디아와 ‘가상 공장’ 구축
또 다른 산업용 로봇 강자 파낙(FANUC)도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세계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 약 20% 점유율을 차지하는 이 회사는 오랫동안 폐쇄적인 기술 전략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방향을 바꾸고 개방형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엔비디아와의 협력이다.
파낙은 엔비디아의 시뮬레이션 플랫폼 Omniverse와 Isaac Sim을 활용해 가상 공간에서 로봇 동작을 학습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가상 공장에서 AI에게 동작을 학습시키면 실제 장비 테스트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또 파낙은 오픈소스 로봇 개발 환경인 ROS(Robot Operating System) 호환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AI 엔지니어들이 파낙 로봇을 직접 프로그래밍할 수 있게 된다.
한 로보틱스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파낙의 ROS 대응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전 세계 개발자 커뮤니티를 자사 하드웨어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략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이 앱스토어를 통해 개발자 생태계를 구축했던 방식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후지쯔 – ‘AI 데이터센터’와 공장을 연결
피지컬 AI 흐름은 IT 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후지쯔는 2025년 엔비디아와 협력을 확대하며 산업용 AI 개발을 추진 중이다. 목표는 데이터센터의 AI와 공장의 로봇을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
후지쯔의 컴퓨팅 기술과 엔비디아 GPU를 결합해 이를 산업용 로봇 제어에 활용하려는 구상이다.
이 시스템이 현실화하면 AI는 단순한 분석 도구를 넘어 공장 전체를 통제하는 두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IT(정보기술)와 OT(제어기술)가 결합되는 새로운 산업 구조를 의미한다.
왜 일본인가…세계가 원하는 ‘물리 데이터’
그렇다면 왜 지금 일본 기업들이 다시 주목받는 것일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물리 데이터의 축적이다.
AI 성능은 결국 데이터의 질에 좌우된다. 일본 제조 기업들은 수십 년 동안 공장에서 마이크론 단위의 동작 데이터와 고장 데이터를 축적해 왔다.
이런 데이터는 GAFA 같은 디지털 기업도 쉽게 확보하기 어렵다.
두 번째 이유는 지정학적 신뢰성이다.
중국 로봇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서방 국가 입장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파트너가 필요하다. 일본 로봇 기업들이 안전한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만 일본 기업의 우위가 영원히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피지컬 AI 경쟁의 핵심은 단순한 로봇 성능이 아니라 ‘누가 물리 세계의 OS를 장악하는가’라는 플랫폼 경쟁이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이 단순한 하드웨어 공급에 머무른다면 다시 IT 기업의 하청 구조로 밀려날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Mujin 같은 소프트웨어 기업이나 야스카와전기 같은 AI 인프라 기업이 주도권을 확보한다면 일본 제조업은 새로운 산업 패권을 쥘 기회를 얻게 된다.
2026년은 그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피지컬 AI는 차기 산업혁명
피지컬 AI는 단순한 기술 트렌드가 아니다.
AI가 스크린을 넘어 현실 세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야스카와전기와 파낙의 주가 상승은 그 변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기업이 ‘로봇의 두뇌’를 장악할 것인지 가려내는 일이다.
비즈니스 리더들은 자사 산업이 ‘피지컬 AI’ 생태계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오랫동안 ‘잠자는 거인’으로 불리던 일본 제조업은 엔비디아라는 촉매를 만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산업혁명의 무대는 더 이상 화면 속이 아니다. 공장과 물류창고, 그리고 현실 세계 그 자체다.
(글=BUSINESS JOURNAL 편집부, 협력=아다치 유스케/로봇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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