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국내 석유화학업계가 심각한 원재료 수급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로 불리는 나프타의 공급 부족이 핵심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정부가 국제에너지기구(IEA)와 협의해 2246만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하기로 했지만, 업계에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해상 운송이 불안정해지면서 공급망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할 때 분리되는 탄화수소로, 에틸렌 등 석유화학 기초 소재를 생산하는 핵심 원료다. 국내에 공급되는 나프타의 절반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수입량의 54%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운반된다.
한국은 2021년 기준으로 러시아산 나프타를 연 5764만배럴 수입했는데, 이는 전체 나프타 수입량의 22.8%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2022년 7월 러시아에 대한 제재 이후 이 공급처가 사실상 단절되면서 공급 다원화가 어려워진 상태다.

정유업계는 비축유가 투입될 경우 경유와 휘발유 같은 수익성 높은 제품의 생산량을 늘리고, 나프타 공급은 줄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문제다. 정유사가 자체 보유한 석유화학 설비에 나프타를 우선 공급하고 남은 물량만 시장에 내놓으면서 전체 공급량이 부족할 수 있다는 우려다.
현재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나프타 재고는 2~3주치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미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시설인 여천 나프타분해시설은 지난 4일 고객사에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했을 정도다.
정부는 3개월간 방출되는 비축유만으로는 나프타 수요 전체를 충족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추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러시아산 나프타 도입 검토를 추진하는 분위기인데, 이는 미국이 지난 12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부과했던 러시아산 원유·석유제품 판매 제재를 일시적으로 완화하기로 결정한 배경이 있다.
미국의 이같은 조처는 국제 유가 안정이라는 경제 안보 차원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 제재 완화에 관련해 정유사와 석유화학사와 함께 원유와 나프타 물량 확보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원유에 대한 자원 안보 위기 경보를 ‘주의’ 단계로 격상한 정부는 공급 확대와 수요 관리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않는 대체 물량 확보와 해외 생산분 도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공공 분야의 의무적 에너지 절약대책과 민간 분야의 자발적 캠페인을 통해 수요 측면에서도 대응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정유 공장이 한 번 멈출 경우 재가동에 한 달 정도 걸린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프타 공급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향후 정부의 러시아산 나프타 도입 가능 여부가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안정성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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