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년간 운용된 첫 잠수함, “폴란드에 무상 양도” 결정
장보고함은 독일 HDW의 209형(1200t급) 설계를 기반으로 한국이 도입한 첫 잠수함으로, 1988년 건조를 시작해 1991년 진수, 1994년 실전 배치됐다. 디젤‑전기 추진과 533mm 어뢰·잠대함 미사일을 탑재해 한때 한국 해군 수중전력의 주력이었지만, KSS‑II·III 신형 잠수함 도입으로 33년 만에 퇴역 수순을 밟게 됐다. 정부는 2025년 말 공식 퇴역 후 이 잠수함을 폴란드에 무상 양도하기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승인했고, 이 같은 뜻을 담은 친서를 폴란드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8조원 ‘오르카 프로젝트’ 겨냥한 전략 카드
표면상 이번 무상 양도는 “우방국 간 군사 협력”이지만, 실제론 폴란드의 차세대 잠수함 도입 사업 ‘오르카(ORKA) 프로젝트’를 겨냥한 전략 카드였다. 폴란드는 3000톤급 신형 재래식 잠수함 3척 도입을 추진 중으로, 기본 계약만 3조원대, 수명주기 운영·정비까지 합치면 최대 8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한화오션은 KSS‑III 기반 ‘안창호급’ 수출형과 함께 퇴역 장보고급 무상 제공을 패키지로 제안하며, 훈련·정비용 플랫폼을 먼저 주고 본계약으로 이어가려는 전략을 택했다. 장보고함은 한마디로 “잠수함 수출전에서 한국이 꺼낸 미끼이자 선물”이었다.

그러나 승자는 스웨덴 A26…폴란드의 입장 변화
하지만 폴란드 해군은 결국 스웨덴 사브 코쿰스의 A26급 잠수함을 오르카 사업 우선협상대상으로 선정했다. 스웨덴은 발트해 작전 경험과 AIP(공기불요추진) 기술, 나토 내 기존 협력 네트워크를 앞세워 독일·이탈리아·한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다. 이로 인해 장보고함 무상 양도는 애초 목표였던 ‘수주전 지원’ 기능을 잃게 됐다. 2026년 초 동아일보 등은 “폴란드가 장보고함 무상 양도 제안을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하며, 정부가 페루 등 다른 국가에 양도 방향을 돌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즉, 폴란드행은 공식 약속까지는 갔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산 수순’에 들어간 셈이다.

이 틈에 등장한 의외의 경쟁자, 필리핀
이 상황을 예의주시한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첨예하게 대치 중인 필리핀 해군은, 동남아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잠수함 전력이 전무한 상태다. 인도네시아·베트남·싱가포르·말레이시아는 이미 독일·러시아·스웨덴 등에서 잠수함을 도입했지만, 필리핀만 수중전력의 공백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 방산 전문 매체와 유튜브 채널들은 한국 정부의 장보고함 폴란드 무상 양도 소식이 나오자 “폴란드가 이미 스웨덴 A26을 선택했다면, 이 잠수함은 필리핀으로 넘어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쏟아냈다. 예산이 한정된 필리핀 입장에선, 새 잠수함보다 훨씬 싼 비용으로 중고 장보고급 1~2척을 들여와 ‘잠수함 운용 첫걸음’을 떼는 시나리오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필리핀의 ‘현실적 욕망’ vs. 폴란드의 ‘상징적 의미’
폴란드가 장보고함을 원한 이유는, 실제 전력이라기보다 훈련·정비·교육용 플랫폼으로 쓰면서 KSS‑III 도입과 연계하는 상징적 카드에 가까웠다. 반면 필리핀은 훨씬 현실적이다. 마닐라에서 열린 ADAS 2024 방산전시회에서 필리핀 국방·해군 수뇌부는 “3단계 전력 증강 계획(2023~2028년)에서 잠수함 전력 확보가 핵심 과제”라고 못 박았다. 한국은 이 사업에 신형 장보고‑III 기반 ‘장보고‑III PN’ 수출형을 제안했지만, 동시에 퇴역 장보고급 2척을 저렴하게 제공해 초기 훈련용·전력화 보조 자산으로 쓰는 패키지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입장에선 “새 잠수함은 최소 2조7천억원 규모, 여기에 중고 잠수함이 보너스로 붙을 수 있다”는 계산이 돌아가는 셈이다.

장보고함의 ‘마지막 항해지’는 어디가 될까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확정된 건 “폴란드에 무상 양도 결정 → 폴란드가 사실상 거절 분위기 → 정부가 페루·필리핀 등 제3국 옵션을 검토”라는 큰 흐름이다. 남미의 페루는 이미 독일 209형 잠수함을 운용 중인 국가로, 한국과의 잠수함 협력·수출 논의에서 장보고급 양도 카드가 오르내리고 있다. 동시에 필리핀은 아직 공식 협상 단계는 아니지만, 방산·국방 채널에서 “장보고급 2척 수출 유력”“필리핀이 K‑잠수함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보도가 이어지며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정부와 방산업계는 폴란드·필리핀·페루 등 여러 변수를 동시에 놓고, 외교·경제·군사 협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장보고함의 ‘은퇴 후 진로’를 조율하는 중이다.

33년 된 중고 잠수함이 보여주는 방산 외교의 민낯
장보고함은 이제 더 이상 한국 해군의 최전선 전력은 아니지만, 폴란드·필리핀에겐 각각 다른 의미로 여전히 매력적인 카드다. 폴란드에겐 “한국과 잠수함까지 협력하는 상징적 파트너십”, 필리핀에겐 “잠수함 0척에서 1·2척으로 올라가는 생존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령의 209급 한 척을 둘러싼 이 조용한 경쟁은, 오늘날 방산 시장이 단순 ‘무기 거래’를 넘어 외교·훈련·기술 이전·지역 안보까지 한꺼번에 얽힌 복합 게임임을 잘 보여준다.
결국 한국이 첫 잠수함 장보고함을 어디로 보내느냐는, 단순한 자산 처분이 아니라 “어느 나라와, 어떤 방식으로 수십 년짜리 안보 파트너십을 맺을 것인가”를 고르는 선택에 가깝다. 폴란드와 필리핀, 그리고 또 다른 후보들이 벌이는 이 ‘눈에 잘 안 보이는 기싸움’의 끝에, 장보고함의 마지막 항해지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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