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콘텐츠는
제3기 겨레얼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잊혀진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날, 도심 속 산책로를 걷다 보면 문득 이 땅에 서려 있는 오랜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매일매일 바쁜 일상을 살아가며 앞만 보고 달려가기 바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아파트 단지 뒤편이나 동네 야산, 공원 한구석에도 수백 년의 시간을 묵묵히 품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답니다.
오늘은 화려하고 분주한 도시의 풍경 뒤에 숨겨진 매우 슬프고도 숭고한 역사의 이야기를 찾아 발걸음을 옮겨보았습니다. 목적지는 바로 인천 계양구 동양동에 위치한 역사적인 유적지입니다. 단순한 유적지 방문이나 가벼운 산책을 넘어, 척박한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정신인 겨레얼을 되새겨보는 무척이나 뜻깊은 시간이었는데요.

인천광역시 계양구 동양동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그날의 아픔과 의로움이 남아 있는 현장, 여러분도 저와 함께 그 고요한 숲길을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고요한 성소, 이선봉 묘역의 첫인상
번화한 도심의 소음을 뒤로하고 안내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평화로운 오솔길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숲이 아낌없이 내뿜는 상쾌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푹신한 흙길을 밟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마저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듭니다.
길의 초입에 조성된 정갈한 나무 계단을 따라 언덕을 천천히 오르며 마주한 곳은 바로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당당히 지정된 이선봉 묘역과 그 가족들의 무덤이 있는 공간입니다.
입구에 세워진 회색빛의 깔끔한 안내 표지판에는 문화유산의 철저한 보호를 위해 취사금지, 금연, 그리고 반려동물 출입 금지를 알리는 픽토그램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이곳이 단순히 가볍게 휴식을 취하는 공원을 넘어, 엄숙하게 관리되고 보호받아야 할 역사적 장소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묘역으로 향하는 산책로 주변으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운동 시설과 화장실 등 각종 편의시설도 아주 잘 갖춰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찾아와 편안하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답니다.
순평군 이선봉과 가문의 평범하고도 비범한 삶
그렇다면 짙은 녹음 속에 고이 잠든 이선봉은 과연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묘역 앞에 세워진 상세한 안내판의 기록에 따르면, 이선봉은 조선 전기인 천오백칠십팔년에 태어나 천육백육십년까지 생존했던 뼈대 있는 조선시대의 왕족입니다. 그는 천사백육십구년부터 천사백구십사년까지 이십오 년간 왕위에 머물며 조선의 기틀을 다졌던 성종의 십이남인 무산군의 손자, 즉 성종 임금의 고손자가 됩니다. 종실의 주요 인물로서 그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순평군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선봉의 자랑스러운 아들인 이필혐 역시 가문의 명예를 훌륭하게 이어받아 수도의 행정을 관할하던 한성부의 판관이라는 중요한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한성부 판관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의 주요 고위 공무원에 해당하는 요직으로, 당시 사회에서 이 가문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원래 부평 동면,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인천 계양구 동양동 일대에 넓게 터를 잡고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심한 시대의 격랑은 이들 가족의 평온했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잔혹한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의 먹구름과 강화도 피난길의 비극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육백삼십육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 병자호란이라는 끔찍하고 처참한 전란으로 이 가문을 가차 없이 밀어 넣었습니다.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청나라 군대가 매서운 눈보라를 뚫고 조선을 침략하자, 국왕인 인조는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고 왕실의 가까운 친척들과 수많은 사대부, 그리고 겁에 질린 백성들은 고향을 등진 채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조선 왕실의 중요한 종실이었던 이선봉 가문 역시 왕의 친척들과 함께 급하게 배를 타고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사면이 깊은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는 예로부터 물살이 유난히 거세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훌륭한 천연 요새이자 안전한 보장처로 굳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피난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화도로 향했고, 그곳에만 도착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후 불과 한 달 남짓 지난 천육백삼십칠년 일월, 강화도의 굳건했던 방어선은 어이없게도 허물어지고 맙니다. 청나라 군대는 작은 배들을 동원해 좁고 험한 해협을 넘어 기어이 강화도에 상륙하고 말았습니다.
굳게 믿었던 섬이 속절없이 함락되자, 평화로웠던 섬은 곧바로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으로 돌변했습니다. 청나라 군사들은 섬 깊숙이 들어와 무고한 양민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부녀자들을 끔찍하게 유린하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적군의 칼날을 피해 험한 산으로 도망치고 차가운 겨울 바다로 뛰어드는 백성들의 애끓는 절규가 강화도의 하늘을 뒤덮었던, 우리 역사상 가장 뼈아프고 처절한 비극의 순간이었습니다.
치욕 대신 죽음을 선택한 두 여인, 그리고 숭고한 겨레얼
이러한 참혹하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이선봉의 부인인 영월 엄씨와 아들 이필혐의 부인인 능성 구씨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과 맑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너무도 슬프고 위대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청나라 군대가 섬 곳곳을 누비며 닥치는 대로 양민을 학살하는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부인 엄씨는 흉포한 적군에게 사로잡혀 평생 씻을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고결한 절개를 지키는 길을 단호하게 택했습니다.
목숨보다 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던 그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또 결연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더욱 놀랍고 가슴 아픈 것은 시어머니의 이런 결연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며느리 구씨의 행동입니다. 구씨 역시 시어머니의 훌륭한 본보기를 따라 일말의 주저함 없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며 숭고한 죽음의 길에 동참했습니다.
전쟁이 가져다준 극도의 공포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명예와 도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으로 맞선 이 두 여인의 늠름한 모습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커다란 울림을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떠한 가혹한 시련과 외부의 압력 속에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는 우리 민족 고유의 올곧은 정신, 즉 살아 숨 쉬는 겨레얼의 진정한 표상이 아닐까요. 훗날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천육백삼십팔년, 이 훌륭한 고부의 애절하고도 장엄한 사연이 마침내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들의 굳건한 헌신과 정절을 높이 기리기 위해 열녀 정려를 내리며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국가적 차원에서 칭송했습니다. 극한의 위기에서 붉게 꽃피운 겨레얼은 이처럼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결코 퇴색되지 않고 빛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민족의 역사를 발굴하고 잊지 않고 기리는 일이야말로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가 언제나 마음을 다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일 것입니다.
세 개의 봉분과 치마폭에 새겨진 애달픈 사연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정절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푸른 잔디가 곱고 단정하게 덮인 묘역의 봉분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슬픔은 더욱 깊어집니다. 언덕 위 묘역에는 총 세 개의 둥근 무덤이 다소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요. 가장 왼쪽 편에 넉넉하게 자리한 것은 이선봉과 부인 엄씨가 죽어서나마 평안을 찾으며 함께 잠든 합장묘입니다. 그 바로 옆인 가운데 무덤에는 아들 이필혐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연안 이씨가 함께 묻혀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홀로 자리한 무덤은 바로 며느리 구씨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만든 가묘입니다. 가묘라는 슬픈 단어에서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안타깝게도 며느리 구씨의 시신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가족의 시신마저 수습할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의 참상이 피부로 와닿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남은 가족과 후손들은 시신 대신 그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을 정성스레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결심하며 남긴 신발 한 켤레와, 피 끓는 심정으로 유서를 빽빽하게 써 내려간 치마폭을 시신을 대신하여 흙 속에 묻고 묘를 조성했다는 안내판의 담담한 설명 앞에서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뜨거운 눈물이 핑 돕니다. 얇은 치마폭에 마지막 작별의 글을 남기고 처연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한 여인의 절박한 심정은 삼백 년이 훌쩍 넘은 지금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옛 돌조각들의 위로
세 개의 애처로운 봉분들 앞에는 수백 년이라는 기나긴 비바람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다양한 전통 석물들이 옛 주인의 곁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선봉 부부의 묘 앞에는 고인의 행적을 기록한 듬직한 묘비와, 제수를 차려놓는 넓적한 상석, 향을 피우는 용도의 향로석이 단정하게 놓여 있으며, 관복을 입고 손에 홀을 쥔 문인석 한 쌍이 엄숙한 자태를 뽐내며 갖추어져 있습니다.
아들 이필혐 부부의 무덤과 며느리 구씨의 묘 앞에도 마찬가지로 반듯한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문인석 한 쌍이 각각 정성스럽게 세워져 죽은 이들에 대한 지극한 예를 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체 묘역의 양 끝에는 영혼이 무덤을 잘 찾아오도록 길을 밝혀준다는 의미를 담은 돌기둥인 망주석 한 쌍이 꼿꼿하게 서서 이 고요하고 슬픈 안식처를 단단히 수호하고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지만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문인석의 돌조각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그날의 끔찍했던 비극을 따뜻하게 다독이며 위로하듯 아주 온화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야속한 시간 속에서도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역사의 증인이 되어준 이 석물들이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겨레얼을 굳건하게 지켜주는 소중한 매개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며, 우리가 일상 속에서 이어가야 할 시대의 정신
따스하고 싱그러운 봄기운을 만끽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산책길이 이선봉 묘역의 나무 계단을 오르며 어느새 묵직하고 깊은 역사
의 성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도심 한가운데 이토록 뼈아프고도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단순히 오래된 옛 무덤을 한번 훑어보는 것을 넘어, 외부의 가혹한 시련 앞에서도 나라와 가정을 올곧게 지키고자 했던 선조들의 결연하고도 매서운 의지와 빛나는 겨레얼을 제 가슴 깊은 곳에 단단히 새길 수 있었던 무척이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과거의 아픈 역사는 자칫 나와는 상관없는, 잊혀지기 쉬운 낡은 옛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찬란한 미래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옛말처럼,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가 사회 곳곳에서 앞장서서 잠든 민족의 혼을 일깨우려 끊임없이 노력하듯이 우리 각자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진지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그저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 가는 것도 좋지만, 여러분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연인, 혹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에서 가까운 지역 유적지를 방문해 고고한 겨레얼의 짙은 숨결을 직접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평범하고 익숙한 풍경 속에 숨겨진 뜻밖의 진한 감동과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로운 교훈을 분명 마주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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