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 시절 중·고등학교 전교 10등 안을 놓치지 않고 전교 1등까지 차지했던 소문난 모범생이 있었다. 특히 경기도 학력고사 모의고사에서는 도내 영어 1등을 기록할 만큼 뛰어난 학업 성적을 자랑했다.
그의 어릴 적 꿈은 법관이었다. 5살 무렵부터 “너는 커서 꼭 판사가 되어야 한다”던 어머니의 당부 속에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법대 진학을 목표로 학업에 매진했다.
뛰어난 성적과 바른 태도에 학교와 주변에서도 그의 밝은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로커가 되는 가수 박완규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하지만 박완규의 가정에는 깊은 아픔과 경제적 어려움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해병대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바로 옆 동료가 총격으로 전사하는 비극을 목격했다.
전쟁의 아픔과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속에서 가계는 갈수록 기울었고, 집안은 경제적으로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전교 1등 우등생의 진로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꺾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대학 학비 마련이 어렵자 빠르게 취업해 생계를 도울 수 있는 실업계 진학을 권유했다.
전교 1등이 실업계에 간다는 소식에 학교와 교사들은 기함을 하며 극구 말렸으나, 박완규는 가족을 위해 인문계 대신 실업계 고등학교(상업고)에 장학생으로 진학하는 길을 택했다.
1980~90년대 당시 실업계 고교 진학은 형편이 어려운 우등생들에게 매우 현실적이고 명민한 선택이었다.
대학 학비 부담을 덜고 부기, 회계, 실무 기술을 배워 졸업 후 은행이나 대기업으로 조기 취업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박완규 역시 장학생으로 진학해 집안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냈다.
대학 진학의 좌절과 가정사에 대한 아픔은 어린 박완규에게 부모와 현실에 대한 방황이자 반항심으로 작용했다. 그 가슴속 답답함과 응어리를 던져낼 창구로 찾은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
상업고 진학 후 록 음악에 눈을 뜬 그는 법전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훗날 밴드 부활의 보컬을 거쳐 솔로 데뷔 앨범 ‘천년지애’의 타이틀곡 ‘천년의 사랑’을 크게 히트시키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보컬리스트 반열에 올랐다.
MBC ‘사람이 좋다’ 등 과거 방송에서 그의 아버지는 “학비가 없어 상고에 보냈지만 미안함이 크다”며 “그래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당당히 자리 잡은 아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첫 번째 꿈을 접어야 했던 박완규. 비록 법관의 길은 걷지 못했지만, 현실의 시련을 딛고 음악이라는 또 다른 무대에서 전설이 되었다.

- 못생겼다는 이유로 탈퇴 요구 받은 유명 걸그룹 멤버…엄마까지 간절 호소
- 얼마나 예쁘길래…20대인대 너무 예뻐 조선 중전으로 캐스팅된 여배우
- 여대생 아니었어? 화제의 ‘전국노래자랑’ 출연한 장신 초등 6학년 여학생
- 공연 딱 4일 남았는데…일방 통보로 전 세계 공연 취소 된 인기 여가수
- 유명 연예인들 헬스 트레이너, 아내가 아들뻘 청년과 눈 맞아 떠나…’멘붕’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