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하영 증조부 ‘안상호’는 누구인가…근대 의학 개척사부터 ‘고종 독살설’ 파문까지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4대째 의사 집안’임을 밝힌 이후, 그의 증조부이자 근대 의학사 인물인 안상호(安商浩, 1872~1927)의 역사적 행적이 조명받으며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하영의 소속사 측은 “증조부가 안상호 선생인 것은 맞다”면서도 친일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으나, 과거 언론 보도와 역사적 기록들이 재조명되면서 그를 둘러싼 공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최초 일본 의사 자격 취득과 왕실 전의 활동
안상호는 한국 근대 서양의학 초창기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1898년 일본 도쿄 자혜의원 의학교에 입학해 1902년 졸업하며 한국인 최초로 일본 정부가 승인하는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04년 귀국한 안상호는 궁중 전의(왕실 전담 의사)로 임명되어 고종과 순종, 의친왕 등을 진료했다. 동시에 지석영이 설립한 의학교 등에서 서양의학을 가르쳤으며, 종로에 개인 진료소를 열어 개원했다. 1908년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의사 중심의 경성의사회에 맞서 한국인 의사들로 구성된 ‘한성의사회’를 결성하고 회장직을 맡는 등 근대 의학 기틀 마련에 기여한 측면도 존재한다.
‘내선일체’ 모범사례로 소개된 친일 행적 논란

긍정적인 근대 의학 개척자로서의 이면에는 친일 협력 및 왜색 생활에 대한 비판적 기록이 남아있다.
1916년 안상호는 서울에서 조직된 실업단체이자 친일 성향 단체로 규정되는 ‘대정실업친목회’ 결성 당시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특히 1918년 12월 1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안상호의 가정이 ‘일선동화(一鮮同化, 일본과 조선의 일체화)의 모범 가정’으로 소개되었다. 해당 기사에서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안상호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했다.
“나도 지금 조선 옷은 한 번도 입지 아니하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는다. 자녀들이 집에서 일본어만 사용하고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완전한 일본인 가정으로 키우고 있다.”
이처럼 일본인화된 생활 방식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점은 당시 조선 민중에게 큰 배신감과 반발을 사며 친일파라는 인식을 강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등재 명단에는 안상호의 이름이 최종 포함되지는 않았다
고종 황제 갑작스러운 붕어와 ‘고종 독살 관여’ 의혹

안상호의 이름이 역사적 파문의 중심에 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였다.
당시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뇌출혈 증세로 쓰러졌을 때, 이왕직 전의로 재직 중이던 안상호는 일본인 의사 모리야스 랜치키와 함께 가장 먼저 호출되어 고종을 진료했다. 그러나 진료 직후 고종이 숨을 거두면서 전국적으로 일제에 의한 ‘고종 독살설’이 급격히 유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과 한 달 전 ‘매일신보’ 인터뷰를 통해 극단적인 왜색 생활과 총독부 정책 추종 성향을 드러냈던 안상호가 독살의 직접적인 수행자 또는 일본 측의 사주를 받은 조력자라는 강력한 의혹을 받았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안상호가 일본인의 지시를 받아 고종에게 독약을 올렸다”는 무고 및 소문이 들끓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역사 연구 기관에 따르면, 안상호가 실제로 일제의 지시로 독약을 투여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료적 증거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역사적 의혹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 그의 친일적 태도가 고종 독살설이라는 대형 역사적 의혹의 주요 인물로 지목되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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