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조상 자랑’으로 추락한 하영과 ‘반역자의 핏줄’ 딛고 국민 영웅 된 우장춘

최근 연예계를 뒤흔든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친일 논란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하영은 최근 방송과 인터뷰 등에서 “4대째 의사 집안이며 증조부가 한양 최초로 양의원을 개원하고 고종 황제를 진료했다”며 집안 내력을 거듭 자랑스레 언급했다.
그러나 하영의 증조부인 안상호는 1902년 일본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자격증을 취득한 인물로, 1916년 이완용·송병준 등 악질 친일파들이 주도한 친일 단체 ‘대정실업친목회(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191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인터뷰를 통해 “나는 일본인과 같아 일본 의복을 입고 아내도 일본 여자”라며 내선일체의 모범으로 소개된 행적까지 드러나 파장이 일었다.
하영 측은 초기에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다가 명백한 사료가 확인되자 입장을 번복하고 자필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무비판적으로 친일 가문의 부와 영예를 자랑거리로 삼아왔다는 비판이 쏟아진 탓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역사 속 또 다른 인물인 우장춘 박사의 삶이 대조적인 사례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는 하영의 증조부보다 훨씬 악명 높은 ‘거두급 친일파’ 우범선이다.
우범선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대대장으로서 일본 낭인들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핵심적으로 가담했던 인물이다. 아버지의 반역과 매국 행위로 인해 집안 전체에는 지울 수 없는 역적의 낙인이 찍혔고, 우장춘은 유년 시절부터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우장춘 박사는 아버지의 그늘에 숨어 가문의 기득권을 누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완전히 정반대의 행보를 걸으며 조국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해방 후 황폐화된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우장춘 박사는 식량난 해결과 농업 재건에 투신했다. 전적으로 일본 등 외산에 의존하던 배추와 무의 우량 종자를 자체 개발해 국내 자급 기반을 완성했다. 바이러스에 취약해 농가를 파탄으로 몰고 가던 강원도 감자의 품종을 개량해 구황작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했고, 척박했던 제주도에 감귤 재배 기술을 체계적으로 보급해 오늘날 제주 감귤 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우장춘 박사는 수천만 한국인의 식탁을 지키고 국가 식량 주권을 세워냄으로써 부친의 씻을 수 없는 과오를 평생의 헌신으로 속죄했다.

하영의 논란과 우장춘 박사의 삶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조상의 과오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후손이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리느냐는 점이다.
친일의 역사를 성찰하지 않은 채 그로 인해 형성된 가문의 특권을 자랑스레 내세우다 지탄을 받는 현실과, 친일파 아들이라는 굴레를 딛고 민족의 은인으로 거듭난 우장춘 박사의 삶은 ‘과거의 과오 앞에 후손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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