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인 열애로 재조명된 ‘두산가’의 뿌리… 창업주 박승직의 친일 행적과 『친일인명사전』 등재 전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간판스타 이강인(파리 생제르맹)과 두산그룹 5세 박상효 씨의 열애설이 세간의 화제를 모으면서, 상대 집안인 두산그룹의 역사와 창업주의 과거 행적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박상효 씨는 박진원 두산밥캣코리아 부회장의 딸이자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의 손녀다.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이 알려진 뒤 온라인과 재계 일각에서는 국내 최장수 기업 타이틀을 지닌 두산그룹의 시초이자 창업주인 고(故) 박승직(1864~1950)의 과거 일제강점기 행적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박승직 창업주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경제 부문에 정식으로 등재되어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산그룹의 모태는 1896년 8월 서울 종로 배오개(현 종로4가)에 설립된 포목상 ‘박승직상점’이다. 박승직은 수입 직물 유통과 대한민국 1호 등록 화장품인 ‘박가분(朴家粉)’ 제조 및 미곡 유통 등으로 사세를 크게 확장하며 근대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박승직의 사업적 번영 뒤에는 일제 총독부 권력 및 친일 관변 단체들과의 긴밀한 유착이 존재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공통된 평가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역사 사료에 따르면, 박승직의 친일 부역 행적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 패망 직전까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참여 (1909년):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를 애도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41인 중 1인)이자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친일 단체 주도 및 내선일체 선전 (1910~1920년대): 1919년 친일단체 ‘조선경제회’ 이사를 지냈으며, 1922년 일선융화(내선일체)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 1924년 반일운동 배척 단체인 ‘동민회(同民會)’ 평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일제 침략전쟁 및 지원병제 찬양 (1938년): 1938년 1월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 신년 좌담회에서 중일전쟁 발발의 책임을 중국에 돌리고 총독부의 시정을 극찬했다. 같은 해 2월에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 발기인으로 나서 “조선인도 제국 신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게 됐다”는 담화를 발표하며 청년들의 전쟁 동원을 독려했다.
전시 총동원 단체 간부 역임 (1938~1940년): 강제징용과 물자 공출의 선봉에 섰던 전시 동원 기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년) 발기인 및 평의원을 맡았고, 이후 확대 개편된 ‘국민총력조선연맹’(1940년)에서도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국방헌금 납부 및 창씨개명 (1940년대): 1940년 성과 이름을 일본식인 ‘미키 쇼쇼쿠(三木承稷)’로 창씨개명하고 상호 또한 ‘미키상사’로 변경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일본 해군에 국방헌금 1만 원을 납부한 것을 비롯해 수차례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일제 군부에 헌납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박승직은 미키상사의 문을 닫고 정계·재계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1946년 장남 고(故) 박두병 초대 회장이 상호를 ‘두산상회(斗山商會)’로 개칭하면서 오늘날의 두산그룹으로 재출범했다. 박승직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조사가 무산되면서 별다른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은 채 1950년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두산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독보적인 역사를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창업주의 친일 전력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등 공인된 사료에 명확히 기록되어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스포츠 스타의 열애설을 계기로 한국 굴지 재벌가의 역사적 뿌리가 다시 한번 대중적 검증대에 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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