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말기 제자들에게 근로정신대 지원을 종용했던 여성 교육인 황신덕의 친일 행적과 피해자의 과거 증언이 역사적 기록을 통해 전해졌다.
초기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일제 말기 침략 전쟁 협력에 앞장서며 제자들을 가혹한 노역 현장으로 내몰았던 그의 행보가 사료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황신덕은 3·1 운동과 여성단체 근우회 활동 등에 참여하며 초기에는 여성 계몽과 사회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후 1940년 현 중앙여자중·고등학교와 추계예술대학교 등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추계학원의 전신인 경성가정여숙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는 관변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과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을 역임하며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전시 동원 체제에 앞장섰다.
특히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황신덕은 전교생 조회를 통해 어린 학생들에게 근로정신대 지원을 강하게 독려했다.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지원하는데, 우리 학교에는 지원할 용감한 여학생이 없느냐”며 학생들의 경쟁심과 수치심을 자극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이에 호응해 손을 들었던 어린 제자들은 일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 강철재 군수공장 등으로 동원되어 총알과 철판을 깎는 등 극심한 위험과 노역에 시달렸으며, 임금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황신덕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강제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그는 추계학원 이사장과 여성문제연구원 원장, 독립유공자 상훈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며 교육계와 여성계의 주요 인사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세월이 흘러 1970년대 병석에 누워 있던 황신덕에게 과거 강제 동원 피해를 입었던 제자가 찾아와 강제 동원의 이유를 묻자, 황신덕은 본인이 잘못을 했고 후회도 하고 있다며 개인적인 후회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생전에 대중을 향한 공식적인 공개 사과나 피해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배상 및 구제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황신덕의 이러한 전시 선전 및 동원 행위를 국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