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을 나오면서
엉뚱한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2500년 전 그리스 사람들도
이 인물들을 항아리와 대리석에
부지런히 새겨 두었는데,
그 얼굴은 과연 어땠을까.
도기화와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 놓고 비교해 봤다.
결과가 꽤 흥미롭다.
오디세우스,
맷 데이먼은 몇 점일까
고대 유물 속 오디세우스에겐
거의 늘 붙어 다니는 물건이 있다.
챙 없는 원뿔형 펠트 모자,
‘필로스’라 불리는 여행자 모자다.
기원후 20년경 제작된
스페를롱가의 조각에서도
그는 수염을 기른 얼굴에
이 모자를 쓴 채 등장한다.
체격 묘사는 더 구체적이다.
일리아스에서 트로이의 원로는
그를 두고 아가멤논보다
머리 하나 작지만
어깨와 가슴은 더 두툼한 사내라 했다.
훤칠한 미남형이 아니라
단단하게 다져진 중년인 셈.
맷 데이먼이 의외로
원전에 가장 가까운 캐스팅이다.
아테나에겐 원래
고정된 얼굴이 없다
젠데이아의 아테나를 두고
너무 어려 보인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도기화 속 아테나는
얼굴로 알아보는 신이 아니다.
투구와 창, 뱀으로 테를 두른
염소가죽 방패 아이기스.
이 소지품이 곧 신분증이었다.
원전에서도 아테나는 소년으로,
목동으로, 노파로 모습을 바꿔가며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난다.
애초에 얼굴이 정해지지 않은 신이다.
헬레네 논란,
원전을 펴 보면
루피타 뇽오의 헬레네 캐스팅엔
고증 파괴라는 반발이 거셌다.
그런데 정작 호메로스는
헬레네의 외모를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성벽 위 노인들이 그녀를 보고
저 얼굴이면 싸울 만도 하다며
수군대는 장면으로 대신할 뿐이다.
금발 미녀라는 그림은
사실 후대 유럽 회화가 얹은 이미지에 가깝다.
놀란 감독도 영화를 보기 전에
오가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며
담백하게 넘긴 바 있다.
페넬로페는
2500년째 같은 자세
기원전 5세기 도기와 조각 속
페넬로페는 늘 한 포즈다.
베틀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고개를 숙인 모습.
기다림 그 자체가
하나의 자세가 된 것이다.
앤 해서웨이가 감정을 눌러 담은
그 표정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폴리페모스는
CG를 쓰지 않았다
키르케는 지팡이와 잔을 든 모습으로,
폴리페모스는 눈을 찔리는 장면으로
고대 도기에 가장 많이 그려졌다.
놀란은 그 외눈박이 거인을
빌 어윈이라는 배우가
직접 연기하게 했다.
10미터 목마도 실물로 지었다.
손으로 항아리에 그림을 새기던
2500년 전 도공의 방식과
어딘가 통하는 고집이다.
얼굴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다
정리하고 보니 원전에는
애초에 얼굴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시대마다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얼굴을 얹어 왔다.
도기화가, 르네상스 화가가,
그리고 올해는 놀란이 그랬다.
개봉 이후 국내 관객은
559만 명을 넘겼고
원작 관련 도서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약 600% 뛰었다.
기원전 8세기의 문장이
다시 서점 매대에 오른 것이다.
배우의 얼굴은 언젠가 잊힌다.
그래도 이야기는 얼굴을 갈아 끼우며
끝내 살아남는다.
극장에서 나온 발걸음이
책장 앞으로 이어졌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값진 여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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