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민이라는 말은 흔히 먼 나라의 전쟁과 국경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난민은 거대한 국제 문제이기 전에 사회와 고향을 잃어버린 한 사람의 문제다. 특히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난민을 보지 않는다면 인권은 쉽게 추상적인 구호에 머물고 만다.
20년의 난민 생활이 남긴 시선

故 홍세화는 프랑스에서 약 20년 동안 정치적 난민으로 살았다. 택시 노동을 하며 이방인으로 살아간 경험은 난민에게 필요한 것이 거창한 동정이 아니라 일상을 이어갈 자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낯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려 본 사람은 문 하나가 닫힐 때 느끼는 막막함을 안다.
숫자 뒤에 가려진 한 사람
그는 한국의 난민 인정과 관련된 숫자를 통해 제도의 문턱이 얼마나 엄격한지 짚었다. 그러나 숫자만 바라보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사연은 사라진다. 난민은 도움의 효율을 계산하기 전에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잃은 개인으로 보아야 한다.
법무의 틀로만 보는 국가의 시선
난민 심사가 외무가 아니라 법무 행정의 틀 안에서 이뤄진다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다. 보호받아야 할 사람을 먼저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제도는 절차를 지켜야 하지만 그 절차의 출발점에는 인간의 존엄이 놓여야 한다.
일상의 질문에도 배제가 숨어 있다
외국인을 만나자마자 돈을 얼마나 버는지 묻는 태도는 그 사람의 가치를 경제적 쓸모로 판단하는 시선과 닿아 있다. 익숙한 혈통과 문화만 정상으로 여기는 마음은 사소한 질문과 거리 두기 속에서도 드러난다. 배제는 거친 말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곁의 난민을 사람으로 보는 일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누가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가려내는 일이 아니다. 다른 문화와 삶의 사정을 인정하고, 내가 고향을 잃었다면 어떤 대우를 바랄지 생각하는 일이다. 역지사지가 빠진 인권은 가장 약한 사람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홍세화가 자신의 긴 난민 경험을 꺼낸 이유는 과거의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한국에 온 난민도 자신과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결국 성숙한 사회의 품격은 낯선 이를 얼마나 경계하느냐가 아니라, 우리 곁의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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