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아침, 남편이 식탁에 앉아 “오늘은 같이 마트에 갑시다”라고 말한다. 아내는 이미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고 세탁과 장보기 순서까지 계획해 둔 참이다.
남편은 모처럼 함께하자는 뜻이었지만, 아내는 자기 하루가 다시 남편 일정에 맞춰져야 하는 듯해 마음이 답답하다.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가 서운함으로 번지고, 남편도 좋은 뜻을 몰라준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직장에 다닐 때는 주말에만 마주하던 부부가 하루 종일 한집에 머물며 흔히 겪는 갈등이다.
먼저 물어야 할 하루
갈등은 단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만 생기지 않는다. 아내는 오랜 세월 집안일과 개인 약속을 스스로 조율하며 자기만의 생활 리듬을 만들어 왔다. 반면 남편은 직장에서 자기 일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습관을 집에서도 그대로 이어가기 쉽다.
같이 외출하자는 제안조차 아내에게는 이미 짜인 하루를 바꾸라는 통보처럼 들릴 수 있는 이유다. 이때 필요한 말은 거창하지 않다. “오늘 뭐 하실 거예요?”라고 먼저 묻고, 서로 비는 시간을 확인한 뒤 계획을 정하면 된다. 순서만 바꿔도 상대의 하루를 존중하는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다.
남편에게도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퇴직 뒤 갑자기 비어 버린 일상에 당황해 아내와 무엇이든 같이하려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허전함을 아내가 모두 채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적절한 부담이 된다.
아내의 약속에 섭섭함부터 드러내기보다는 귀가 시간을 듣고 자신의 일정을 세우는 편이 낫다. 동행은 의무가 아니라 서로 시간이 맞을 때 누리는 즐거움이어야 한다.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기보다 각자의 시간을 인정하는 태도가 우선이다.
도움 아닌 나의 몫
집안일을 둘러싼 말투 역시 마음의 거리를 넓힌다. 남편이 설거지를 마친 뒤 “내가 도와줬잖아”라고 말하면 수고한 행동보다 그 말에 담긴 전제가 먼저 들린다. 집안일은 본래 아내 책임이고 자신은 힘을 보탰을 뿐이라는 뜻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해온 노고를 가볍게 여겼다는 서운함도 겹친다. 함께 사는 집의 일은 누군가를 돕는 시혜가 아닌 각자의 생활 몫이다. “제가 설거지할게요”라고 말하고 반복해서 맡는 편이 바람직하다. 매번 지시를 기다리기보다 눈에 보이는 일을 하나씩 맡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사 분담은 한 번 크게 나서는 것보다 작게라도 꾸준히 이어질 때 편안해진다. 청소나 설거지 가운데 자신이 맡을 일을 정하고, 아내의 기존 방식과 다른 점은 먼저 물어보는 것이 좋다.
남편에게는 사소한 차이라도 아내에게는 오랫동안 다듬어 온 일상의 순서일 수 있다. 남편 역시 처음부터 능숙할 수는 없으므로 완벽함을 조급하게 바랄 필요는 없다. 생색을 줄이고 책임을 늘리면 집은 아내가 관리하고 남편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꾸려가는 보금자리로 변해간다.
혼자서도 편안한 시간
아내가 외출했을 때 자꾸 전화를 걸어 언제 오는지 묻는 행동도 비슷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남편은 외로워서 연락하지만 아내는 외출을 감시받는 듯해 불편을 느낀다. 퇴직 전 남편에게 직장과 모임이 있었듯 아내에게도 오랫동안 쌓아 온 관계와 일과가 있다. 남편의 퇴직이 아내 삶의 퇴직까지 의미하지는 않는다.
산책이나 독서처럼 혼자 즐길 일을 정하고 연락은 꼭 필요한 때만 하는 편이 좋다. 부부는 늘 붙어 있어야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서로의 시간을 지켜 주면서 다시 만날 때 반가운 관계가 더 오래 편안하다. 먼저 묻고, 자기 몫을 맡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는 작은 변화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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