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모임이나 명절 식사를 마친 뒤 거실에 둘러앉은 자리에서 할머니가 손주의 손에 용돈을 쥐여 준다. 아이는 환하게 웃고 가족들도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런데 할머니가 목소리를 낮춰 “엄마한테는 비밀이야”라고 덧붙이는 순간 며느리의 표정이 잠시 굳는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왜 자신만 빼놓느냐고 물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용돈이 이 한마디 탓에 불편한 기억으로 남는 순간이다.
비밀이 만드는 거리
할머니에게 그 말은 손주와 가까워지고 싶은 친근한 장난일 수 있다. 자신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도 담긴다. 그러나 며느리에게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전달된다.
아이를 돌보며 돈 쓰는 습관을 가르치는 부모를 따돌리고 몰래 무언가를 주고받자는 뜻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아이도 뜻하지 않게 엄마에게 숨겨야 할 비밀을 떠안는다. 친밀함을 얻으려 던진 말이 가족 사이에 편을 가르는 선이 되는 까닭이다.
“엄마는 용돈 안 주냐”거나 “엄마는 이런 것도 안 사주냐”는 질문도 비슷하다. 그저 손주와 대화를 이어 가려는 말이라 해도 며느리는 자신이 부족한 부모로 평가받는 기분이 든다.
손주가 안 준다고 답하면 괜히 해명해야 할 것 같고, 준다고 답하면 할머니의 호의를 무색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아이에게 건넨 가벼운 질문이지만 정작 대답의 무게는 며느리가 지게 된다.
비교가 남기는 서운함
“우리 아들은 바빠서 못 챙기니 내가 줘야지”라는 말도 조심할 대목이다. 아들을 나무라거나 감싸는 뜻으로 무심코 꺼냈더라도 며느리에게는 비교로 들릴 수 있다. 아빠가 못 하는 몫을 할머니가 대신한다는 구도가 만들어지면 엄마가 그동안 해 온 노력은 자연스럽게 지워진다.
부모마다 용돈을 주는 기준과 시기가 다를 수 있는데, 가족 앞에서 누가 더 주고 덜 주는지를 따지면 고마움보다 부담이 먼저 남는다. 상황을 바꿀 방법은 어렵지 않다. 용돈을 준비했다면 먼저 며느리와 아들에게 “오늘 아이에게 용돈을 줘도 될까”라고 알리면 된다.
허락을 받아야 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자리를 존중한다는 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손주에게는 “할머니가 주는 용돈이니 필요한 데 잘 쓰면 좋겠다” 정도면 충분하다. 부모가 주는 돈과 비교하지 않고, 어디에 쓸지 캐묻거나 몰래 보관하라고 당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아이가 부모에게 보여 주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 태도까지 갖추면 용돈의 의미가 한결 편안해진다.
마음만 남기는 말
며느리도 할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자신의 기준이 존중받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니 용돈을 주며 생색을 내거나 부모를 평가하는 말을 보태기보다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면 된다.
혹시 예전에 무심코 비밀을 만들었다면 길게 변명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는 먼저 이야기할게요”라는 한마디면 관계는 다시 부드러워진다. 손주에게 주는 돈의 크기보다 오래 남는 것은 어른들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다. 말을 조금 덜어 낸 자리에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더 또렷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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