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두산그룹의 역사적 변곡점을 이야기할 때 ‘외환위기 2년 전 단행한 기적의 선제적 구조조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룹의 모태이자 황금알을 낳던 거대 소비재 기업 OB맥주를 과감히 매각하고 중공업 중심의 포트폴리오로 체질을 개선해 외환위기(IMF)의 칼바람을 피해 갔다는 세간의 찬사다.
하지만 당사자인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대중의 환상을 정면으로 깨부순다. 미래를 내다본 치밀한 혜안이 아니라, 그저 빚을 갚지 못해 서서히 죽어가던 회사의 절박한 생존 몸부림이었다는 것이다.
빚더미와 출혈경쟁, 감내할 수 없던 현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국내 주류 시장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두산은 막대한 규모의 설비 투자를 단행했다. 문제는 그 대규모 공장 증설 자금을 대부분 금융권 차입금으로 조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시장 독점 구도가 깨지며 사방에서 경쟁사의 거센 공세가 시작됐다. 하이트맥주가 지하 천연 암반수를 앞세워 맥주 시장을 강타했고, 소주 시장 역시 치열한 점유율 전쟁이 펼쳐졌다. 물량은 급감하는데 빚에 따른 금융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95년 말에는 더 이상 그룹 전체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다.
안 팔리는 찌꺼기가 아닌 ‘황금알’을 팔아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단행된 구조조정의 기본 원칙은 통념을 완벽히 뒤엎었다. 위기에 직면한 많은 조직이 신통치 않은 비주력 사업을 먼저 정리하고 핵심 우량 자산을 품에 안고 버티려 든다. 그러나 박 전 회장은 그렇게 쥐고 있다가는 모든 것이 서서히 죽어가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직관했다.
당장 확실한 현금을 확보해 숨통을 틔우지 못하면 다음 기회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우량 자산이자 그룹의 상징이었던 OB맥주를 매각 1순위로 올렸다. 당시 그룹 원로였던 큰형 고 박용곤 명예회장 역시 “다 팔고 아주 작은 것 하나 남더라도, 거기서부터 다시 일어서면 된다”는 한마디로 매각을 승인했다.
자존심과 영광에 집착하지 않고 가장 아끼는 뼈를 먼저 깎아내는 과감함이, 파산 직전의 기업을 건져 올린 냉혹한 경영의 본질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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