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고통이 닥치면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고 익숙했던 관계마저 어긋나면,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불안감도 한층 커진다. 하지만 고통은 오직 실패만을 알리는 단호한 판결문이 아니다.
작가 장재형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바탕으로 던지는 질문도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이 나를 무너뜨리는 불행인지, 아니면 이전의 나를 넘어서는 과정인지는 고통의 크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고통은 익숙한 삶에 생긴 균열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잃어버린 것만 유독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믿었던 사람이 멀어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의 평온함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삶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나아가기 어렵다는 신호일 수 있다.
참고 견디기만 했던 관계, 남의 기대에 맞추느라 미뤄 두었던 선택, 실패가 두려워 붙잡고 있던 자리가 비로소 선명해진다. 아픔을 무조건 좋은 일로 포장하거나 꾸밀 필요는 없다. 다만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똑바로 바라볼 때, 고통은 막연한 불행에서 삶의 방향을 다시 묻는 귀중한 질문으로 바뀐다.
연단은 상처를 미화하는 일이 아니다
고난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말은 자칫 모든 상처를 참으라는 가혹한 요구로 들릴 수 있다. 니체의 지혜가 가리키는 연단은 부당한 대우를 무작정 견디거나 도움을 거절하는 태도와는 명확히 다르다. 진정 중요한 것은 아픔 속에서도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바꿀 수 없는 사실은 겸허히 인정하되, 그 사실이 내 가치까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넘어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무능하다고 단정하지 않고,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사랑받을 자격까지 사라졌다고 여기지 않는다. 고통과 나를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볼 때 상처는 정체성이 아니라 지나가는 경험이 된다.
내 삶의 기준을 되찾는 초인
니체가 말한 초인, 즉 위버멘쉬의 태도는 남보다 강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타인이 정한 성공과 인정에 매달리던 자신을 넘어 스스로 삶의 기준을 단단히 세우는 일에 가깝다. 타인의 평가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면 칭찬을 받을 때는 안심하지만 외면받는 순간 삶 전체가 뿌리째 흔들린다.
반대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 직접 판단하는 사람은 어떤 고통 앞에서도 선택권을 잃지 않는다. 시련은 그동안 누구의 기준으로 살아왔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사람은 타인의 기대를 수행하는 자리에서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자리로 옮겨 간다.
견딘 시간보다 달라진 기준을 본다
모든 고통이 저절로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소진시키는 환경에서는 먼저 벗어나거나 도움을 구하는 판단이 우선일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의 의미는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가 아니라 그 일을 거치며 삶의 기준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로 살펴야 한다.
이전보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관계를 알아보고, 남의 시선보다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게 되었다면 이미 다음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의 가치는 상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도 내 삶의 주인으로 남으려는 힘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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