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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경조사에 30년간 빠짐없이 갔는데..” 내 딸 결혼식 날 도착한 문자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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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며 맺는 수많은 인연 중에서도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들과의 관계는 유독 특별한 무게를 지니기 마련입니다. 젊은 시절의 고단함을 함께 견디고, 자식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쁜 날에는 축하를 나누고 슬픈 날에는 서로의 어깨를 감싸주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순을 넘기고 하나둘 가족을 떠나보내는 나이가 되면 오래된 친구는 단순한 지인을 넘어 삶을 지탱해 주는 또 하나의 가족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순여덟 살이 되던 해, 외동딸의 결혼식 날 도착한 문자 한 통은 제가 30년 넘게 지켜온 우정의 의미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제 이름은 김영숙,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경기도 수원에서 남편과 함께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며 외동딸 수진이를 키웠습니다. 남편은 6년 전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는 철물점을 정리한 돈과 얼마 되지 않는 연금으로 혼자 생활해 왔습니다. 평생 넉넉하게 살아본 적은 없지만, 사람 사이의 도리만큼은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른두 살 무렵부터 함께한 일곱 명의 친구들은 제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동네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친해진 사이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밥을 먹고 남편 흉도 보며 웃던 것이 어느덧 3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아이들은 자라서 결혼했고, 우리 머리에는 흰머리가 늘어났습니다. 서로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남편에게도 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이 평생 제 곁에 남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동안 친구들 집안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5년 전 미정이의 큰아들이 대전에서 결혼했을 때는 철물점 문을 하루 닫고 새벽 첫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순자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장례식장에서 이틀 밤을 함께 지새웠고, 정희의 딸이 결혼할 때는 생활비를 줄여 축의금 50만 원을 마련했습니다. 말숙이가 허리 수술을 받았을 때는 직접 죽과 반찬을 만들어 병원까지 가져다주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제 일처럼 기뻐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려고 애썼습니다.

물론 저 역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철물점 장사가 잘되지 않던 시절에는 월세와 공과금을 걱정해야 했고, 딸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적금을 해약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친구들의 경조사만큼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돈이 부족하면 다른 생활비를 줄였고, 먼 지방에서 결혼식이 열리면 교통비를 아끼려고 새벽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남편은 살아생전 그런 저를 보며 걱정스러운 말을 하곤 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친구들 일이라면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우리 형편도 생각해야지. 남들 챙기는 것도 좋지만 당신 자신부터 좀 챙겨.”

그러면 저는 늘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남는 게 결국 사람 아니겠어요. 내가 어려울 때도 저 친구들이 곁에 있어 줄 거예요.”

남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그때는 그 한숨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친구들에게 더욱 의지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밤늦도록 곁을 지켜주었던 친구들의 따뜻한 위로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임의 총무였던 미정이는 제 손을 붙잡으며 앞으로는 자신들이 가족처럼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던 작년 봄,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서른여섯 살이 된 외동딸 수진이가 결혼하겠다고 남자친구를 데려온 것입니다. 딸은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집안 살림을 돕느라 자신의 행복을 뒤로 미뤄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생활비를 보탰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매달 제게 용돈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런 딸이 마침내 자신을 아껴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린다니 기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딸은 결혼식을 소박하게 치르고 싶다며 수원의 한 컨벤션 웨딩홀을 예약했습니다. 신혼집 마련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며 불필요한 지출은 줄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집처럼 화려한 결혼식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적어도 오랜 친구들만큼은 빠짐없이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혼주석을 지켜야 하는 제게 그들의 존재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한 달 전, 저는 친구들 단체 대화방에 모바일 청첩장을 올렸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딸을 시집보내려니 마음이 허전하다며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미정이가 답장을 보냈습니다.

“영숙아, 드디어 수진이가 결혼하는구나! 당연히 가야지. 우리가 안 가면 누가 가겠어. 걱정하지 마.”

순자도 곧바로 축하한다며 결혼식 날 일찍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른 친구들 역시 꽃 그림과 하트 표시를 보내며 기뻐했습니다. 저는 그 대화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행복해했습니다. 평생 친구들에게 베풀었던 정성이 이런 날 든든한 위로로 돌아오는구나 싶었습니다. 딸에게도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이모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마침내 결혼식 날이 밝았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일어나 연보라색 한복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제 옆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었을 텐데, 텅 빈 안방을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나 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인 만큼 눈물보다는 웃음으로 하루를 보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식장에 도착한 뒤에는 직원에게 부탁해 신부 측 앞자리에 친구 일곱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전 열한 시가 지나자 하객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친척들과 딸의 직장 동료들, 철물점을 운영할 때 인연을 맺었던 단골손님들까지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저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와서 제 곁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친구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열한 시 삼십 분쯤 휴대전화로 미정이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영숙아, 정말 미안하다. 갑자기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못 갈 것 같아. 수진이 결혼 축하한다고 전해줘.”

조금 서운했지만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5분 뒤 순자에게서도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했지만 정희와 말숙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경자는 개인 사정이 있다며 짧은 답장만 보냈습니다. 결혼식 시작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친구들을 위해 마련한 일곱 개의 의자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예식장 직원이 다가와 예약된 자리를 다른 하객들에게 안내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저는 애써 웃으며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30년을 함께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집안에 기쁜 일이 생기면 먼 지방까지 달려갔던 저였지만, 정작 제 딸의 결혼식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시작되었습니다. 곱게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이 제 손을 잡고 천천히 입장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딸을 위해 제가 직접 신랑에게 손을 건네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고, 사위는 듬직한 모습으로 저희를 맞이했습니다. 저는 딸의 손을 놓으며 남편이 하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혼주석에 앉아 식을 지켜보는 내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친구들이 앉기로 했던 자리로 눈길이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모르는 다른 하객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온전히 축복해 주고 싶었지만, 서운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가족사진까지 촬영한 뒤, 딸이 조심스럽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엄마, 그런데 미정 이모랑 순자 이모는 안 오셨어?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저는 다들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러나 딸은 제 표정만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한 듯했습니다. 평생 친구들 집안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던 엄마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제 얼굴을 바라보던 딸은 손을 꼭 잡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엄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나는 엄마가 여기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저는 급히 고개를 돌려 화장을 고치는 척했습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날만큼은 서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워낸 지난 세월이 떠오르면서, 그저 오늘 하루만큼은 모든 일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진짜 충격은 결혼식이 끝난 뒤 찾아왔습니다.

오후 네 시 무렵, 모든 하객을 배웅하고 신부 대기실 한쪽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휴대전화에 친구들 단체 대화방의 알림이 떴습니다. 미정이가 보낸 장문의 문자였습니다.

“영숙아, 오늘 수진이 결혼식 잘 치렀지? 사실 우리끼리 며칠 전에 이야기를 좀 했어. 이제 나이도 있고 자식들 경조사까지 전부 챙기려니 부담스럽더라고.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 자식 결혼식 같은 경조사는 챙기지 않기로 했어. 오늘 다들 못 간 것도 그런 이유가 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나이에 서로 이해하면서 지내야지.”

저는 그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특히 ‘우리끼리 며칠 전에 이야기를 좀 했어’라는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습니다. 저를 제외한 일곱 명이 이미 따로 의논을 끝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약속의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제 외동딸의 결혼식이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 경조사가 부담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은퇴 후 수입이 줄어들고 건강까지 나빠지면 축의금이나 부의금이 경제적으로 버거워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그 결정의 시기였습니다. 미정이의 두 아들이 결혼할 때도, 순자의 딸이 결혼할 때도, 정희의 둘째 아들이 혼례를 치를 때도 누구 하나 경조사를 줄이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들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갈 때는 모두가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차례가 되자 모두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약속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저는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그리고 곱게 차려입은 한복 치마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돈이 아까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축의금 10만 원이나 20만 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외롭고 마음이 허전했을 날, 가족처럼 믿었던 친구들이 한 사람도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서러웠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저는 남편의 사진 앞에 앉아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습니다. 살아생전 남편이 남들 챙기는 것도 좋지만 제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사람이 너무 계산적으로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남편이 무엇을 걱정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친구들에게 느낀 실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예전에 저희 모임에도 몇 번 참석했던 동네 후배 혜란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안부를 묻던 혜란이는 조심스럽게 친구들이 결혼식에 참석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뜻밖의 질문에 놀랐지만 사실대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혜란이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결혼식 전날 저희 친구 일곱 명이 광교의 한 식당에 모여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혜란이는 같은 식당에서 가족들과 식사하고 있었는데, 가까운 자리에 앉은 친구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친구들은 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몇몇 친구가 그래도 영숙이 딸 결혼식인데 가야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미정이는 이제 경조사를 그만 챙길 때도 되었다며 다른 친구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특히 제가 원래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니, 그동안 스스로 좋아서 했던 일을 친구들이 반드시 똑같이 갚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혜란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언니, 사실 그분들 결혼식 날 다 같이 속초로 여행 갔어요. 숙소도 예약해 놨고 맛집도 찾아놨다면서, 결혼식 때문에 여행을 취소하기는 아깝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언니한테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정말 고민했어요.”

순간 제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미정이는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고, 순자는 몸이 아파서 못 온다고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아예 연락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함께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제 딸 결혼식 날짜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날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저는 한참 동안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보다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그동안 친구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들은 저를 정말 가족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필요할 때마다 찾아와 주는 편리한 사람 정도로 여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오래된 경조사 수첩을 꺼냈습니다. 친구들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제 얼마의 축의금과 부의금을 냈는지 적어둔 기록장이었습니다. 한 장씩 넘기자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정이 아버님 장례식, 순자 아들 결혼식, 정희 딸 결혼식, 경자 어머님 장례식. 그 안에는 돈의 액수뿐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 비워두었던 시간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수첩을 넘기던 중 남편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짜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남편을 잃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그날, 미정이는 제 손을 붙잡고 앞으로는 자신들이 가족처럼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6년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 없는 제가 혼자 딸을 시집보내는 날, 바로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설득해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팠습니다.

저는 수첩을 덮으며 처음으로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평생 지켜온 우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진심으로 사람을 아끼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친구들 단체 대화방에서 조용히 나왔습니다. 누구에게도 따지지 않았고, 여행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제 마음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그 관계를 조금씩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미정이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라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습니다. 미정이는 예전과 다름없이 반가운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손주 이야기와 남편 건강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뜻밖의 부탁을 꺼냈습니다.

순자의 둘째 아들이 다음 달에 결혼하는데, 이번에는 모임 사람들이 모두 참석해 축하해 주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순자의 형편이 어려우니 친구들이 함께 힘을 보태야 한다며 저에게도 꼭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불과 두 달 전, 제 딸 결혼식 날 앞으로는 자식들 경조사를 서로 챙기지 말자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다 함께 참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미정아, 우리 딸 결혼식 날 네가 보낸 문자 기억하니? 그때 앞으로는 서로 경조사 안 챙기기로 했잖아.”

제 질문에 미정이는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그러더니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며, 순자는 아들이 둘이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우니 친구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미련마저 사라졌습니다.

“미정아, 내 딸도 내게는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자식이야. 너희 자식만 귀하고 내 자식은 덜 귀한 게 아니잖니.”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한참을 숨을 고른 뒤 그동안 참아왔던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친구들이 제 딸 결혼식에 오지 못한 것 자체보다, 서로 의논해 저만 제외하고 약속을 바꿨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일이 생겼다며 거짓말을 하고 다 같이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미정이는 당황한 듯 변명하려 했지만, 저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에게 비싼 축의금을 바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딸을 시집보내는 날, 그저 곁에 와서 손 한번 잡아주고 고생 많았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주었으면 충분했습니다.

“나는 너희 경조사에 돈을 돌려받으려고 간 게 아니야. 너희가 좋았고, 너희 가족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으니까 간 거야. 그런데 너희한테 내 딸 결혼식은 그만큼 소중하지 않았나 봐.”

그 말을 끝으로 저는 순자 아들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임에도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흘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은 홀가분했습니다. 평생 누군가에게 서운하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예순여덟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제 마음을 지킨 것 같았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뜻밖의 손님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모임에서 가장 말수가 적었던 선옥이였습니다. 선옥이는 귤 한 상자를 들고 와 거실에 앉더니 한동안 찻잔만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털어놓았습니다.

선옥이 역시 결혼식 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갔지만, 사실 처음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남편 없이 혼자 딸을 시집보내는 날이니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모두 여행을 가기로 하자 혼자 반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난 뒤에도 마음이 불편했고, 결혼식이 끝난 후 제가 단체 대화방에 남긴 짧은 답장을 보며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선옥이는 가방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습니다. 안에는 뒤늦게 준비한 축의금 10만 원과 손으로 쓴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제가 선옥이의 수술 당시 병원까지 죽을 끓여왔던 일과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밤늦도록 곁을 지켜주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작 제가 가장 외롭고 마음이 허전했을 날, 자신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며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저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30년 동안 제가 건넨 마음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선옥이도 함께 울었습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손을 붙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영숙아, 내가 정말 미안해.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다 알면서도 그날 너 혼자 있게 만들었어. 친구들 눈치 보느라 정작 제일 중요한 걸 잊었나 봐.”

저는 선옥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리고 돈 때문에 서운했던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제 마음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는 사실이 아팠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선옥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사과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서른 해 동안 함께했던 추억과 결혼식 날의 상처를 하나씩 꺼내놓으며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친구들 모임에는 나가지 않습니다. 선옥이와는 가끔 따로 만나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지만, 나머지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오랜 친구들을 잃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저는 일곱 명의 친구를 잃은 것이 아니라, 제게 진심을 건네는 한 사람의 소중함을 뒤늦게 발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는 딸 수진이가 신혼집으로 저를 초대했습니다. 사위가 직접 저녁을 준비했고, 딸은 제가 좋아하는 과일을 한가득 사다 놓았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딸은 요즘 제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며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이제야 조금 철이 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평생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았지만, 이제는 제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누군가 서운해할까 봐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제 형편이 어려워도 남부터 챙기는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딸은 그런 제 이야기를 듣더니 한참 동안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 자신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이 살아생전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남들 챙기는 것도 좋지만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했던 그 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남편이 너무 계산적으로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말속에 담긴 걱정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오래된 경조사 수첩을 다시 꺼냈습니다. 30년 동안 빼곡하게 적어두었던 이름과 날짜들을 천천히 넘겼습니다. 그 안에는 축의금과 부의금의 액수뿐 아니라 제 젊은 날의 정성과 시간, 그리고 사람을 믿었던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수첩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제 마음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제가 그동안 베풀었던 선의까지 잘못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기쁨을 축하했던 순간들은 분명 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그 마음을 나누는 방식이 조금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챙기느라 정작 제 밥 한 끼를 굶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제 마음을 무조건 참는 일도 줄이겠습니다. 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끝없이 이해를 구하지도 않겠습니다. 대신 저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해 주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겠습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오래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깊은 것은 아닙니다. 함께한 세월이 30년이든 40년이든, 정작 내가 가장 힘들고 외로운 순간에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내 곁을 지켜주는지가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짧은 인연이라도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한다면 평생의 벗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딸의 결혼식 날, 친구들을 위해 마련했던 일곱 개의 빈 의자를 저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 친구들이 보낸 문자 한 통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억을 원망으로만 간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인생에서 어떤 관계를 지켜야 하고, 어떤 관계를 내려놓아야 하는지 알려준 값비싼 가르침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예순여덟 해를 살아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내 곁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나 역시 그들 앞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내가 평생 남에게 베푼 마음을 반드시 돌려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 진심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곁에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이제 저는 남은 인생을 조금 더 홀가분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기보다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소박한 행복을 나누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가끔 남편 사진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여보, 당신 말이 맞았어요. 사람이 살면서 남는 게 사람인 건 맞는데, 그 사람이 꼭 많을 필요는 없더라고요. 이제는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들하고만 웃으면서 살게요.”

창밖으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옵니다. 혼자 앉아 마시는 차 한 잔이 오늘따라 유난히 향긋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친구들에게 연락할 시간을 떠올렸겠지만, 이제는 그저 이 고요한 시간이 좋습니다.

30년 동안 친구들의 경조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제가, 정작 제 딸 결혼식 날 받은 것은 축하의 꽃다발도 따뜻한 위로도 아닌 차가운 문자 한 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문자 덕분에 저는 예순여덟의 나이에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진짜 우정은 내가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가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소중한 순간을 얼마나 진심으로 지켜주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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