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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뻘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한국서 살고 있는 프랑스 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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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31번째 영화 <여행자의 필요> 리뷰

<여행자의 필요>는 홍상수 감독의 31번째 영화이자 제7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차지했다. 세계적인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다른 나라에서>(2012), <클레어의 카메라>(2017)에 이은 세 번째 만남이다. 그때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막걸리에 진심인 프랑스 여자

영화는 크세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누구도 이리스가 왜 한국에 왔는지 알지 못한다. 고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언어를 가르쳐 봤는지, 물어봐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맨발로 땅을 밟는 게 좋고, 시원한 바위에 눕는 걸 즐기고, 하루에 막걸리 한 병이면 족할 뿐이다.

돈, 명예보다 오로지 소신대로 움직이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이런 이리스를 친구 인국(하성국)은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따스한 감정으로 보살펴 준다. 정확히 말하면 시인 지망생인 인국의 집에 이리스가 얹혀사는 형국이다. 글 쓰느라 제대로 생계를 꾸리기 힘든 인국에게 월세 대신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 인국의 도움으로 시작한 불어 수업이 쏠쏠한 수입원이 된 것. 이리스는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어 매일이 기쁘다.

다른 언어로 진심을 말할 때

이리스는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부르기엔 믿음직스럽지 않다. 자신은 여행자들을 위한 생계형 언어가 아닌, 속마음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줄 알고 꾸밈없는 감정을 말할 수 있는 진짜 언어를 가르친다는 소리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고 경력은 한 달밖에 안 되었지만. 자신만의 소통법으로 새로운 경험을 즐겨 볼 학생을 찾는다는 거다.

수업은 특별한 구성과 형식이 없다. 이리스의 방식대로 사고하고 배운다면 모국어로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로 훨씬 깊이 있는 교육이 될 거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이리스의 학습 방식에 빠져들어 결국 설득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리스는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질문한다. 피아노나 기타를 연주하고 난 후 학생에게 솔직한 감정을 묻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학생은 다르지만 매번 비슷한 대답을 한다. ‘연주를 잘하고 싶은데 실력이 좋지 못해 짜증 난다’며 타인의 시선에 의식하고 매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이리스는 찰나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인덱스카드에 메모한다. ‘항상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기 위해 피곤하다’고 쓴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본 한국인의 천편일률적인 가치관, 틀에 갇힌 사고방식이다. 이리스를 통해 우리가 잘 몰랐던 낯설게 보기를 시도 한다. 학생들은 종종 의문스러워했지만 차차 스스로를 돌아보며 통찰력이 생긴다.

익숙한 듯 낯선 이리스의 신묘함

홍상수 감독은 또다시 일상의 유머와 낯설기 보기를 시도한다. 모국어, 막걸리, 모나미 펜, 한식, 석비 등 익숙해서 소중함을 잃어버린 가치를 더듬는다. 이리스는 막걸리와 비빔밥을 즐기고, 산에 올라 피리를 불고, 동네를 거닐며 한국의 시를 읊는다. 윤동주의 ‘서시’, ‘새로운 길’을 외국인의 시선과 목소리로 들으니 신선하다. 모국어를 다른 나라에서 들었을 때 반가움과 안정감이 드는 마음이 공명한다.

이리스는 누구일까? 정체성을 탐구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든다. 정확하게는 프랑스에서 왔다고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알 수 없다. 현자, 정령, 신선, 도인 혹은 한국을 알고 싶어 온 여행자일까? 영화는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녀는 기묘하다. 빨간 원피스에 녹색 카디건을 걸친 보색대비 패션. 웨지를 신고 사뿐사뿐 동네를 거닌다. 어릴 때부터 써왔다던 모자까지 장착하면 초여름의 더위를 식히는데 이만한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숲길, 산길,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마주한 작은 냇가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시원한 폭포수가 그림같이 펼쳐지는 정자에서 낮잠을 자거나, 동네 도서관을 거닐다 지치면 막걸리 한잔 걸치고 신선처럼 공원 바위에 누워 한숨 돌린다.

근린공원의 벤치에 앉아 리코더를 잔인하게 불어대는 순진함과 나이 어린 남자와 세대 차이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여유로움도 가졌다. 모두의 친구처럼 곁을 스쳐지나 간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모나미 볼펜을 꺼내 떠오르는 심상을 메모한다. 공교롭게도 불어로 모나미는 나의 친구라는 뜻인데 국민 볼펜 브랜드라 그마저도 웃음이 난다.

반복되는 홍상수 영화의 인장

벌써 31번째 장편 영화를 제작한 홍상수 감독은 최대한 주변의 것을 이용해 빠르게 찍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항간에는 대본은 없고 상황만 제시해서 힘들다는 말이 퍼졌는데 배우 인터뷰에 따르면 어느 것도 우연에 기대 찍지 않는다고 답한다.

촬영 시간에 가까워 그날의 대본이 나오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항상 존재한다. 감독의 디렉션은 정확하고 모든 것은 스태프의 엄격한 통제하에 만들어지는 영화란 소리다. 대충 생각해서 만드는 즉흥적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연성, 날 것 같아 보이는 자연스러움이 홍상수의 인장이다.

홍상수 사단이라 할 만한 배우로 꾸려져 익숙한지만 변주를 준다. 최근에는 50-60대 홍상수의 페르소나 같은 중년 남성 역할에 권해효, 기주봉, 50-60대 여성 지식인 역할에 이혜영이 추가되었다.

젊은 남성 역할에 하성국, 신석호, 여성은 김승윤, 박미소 등 익숙한 배우와 작업한다. 제작실장에 이름 올리는 김민희도 가끔 배우로 등장해 반갑다. 또한 지인 집이나 건물에서 촬영하길 즐긴다. 이번에도 세 배우의 집을 활용했다. 첫 아파트는 권해효의 집, 두 번째 저택은 이혜영의 집, 세 번째 작은 집은 하성국의 집이다.

갑자기 당겨 찍는 다든지, 음악이 나온다든지, 초록색 소주병을 늘어놓고 대화했던 것을 지나 이제는 흰 막걸리를 마신다. 감독의 술 취향도 조금은 변하는 건지 아리송하다가도 한국 문화의 대중화에 발맞춘 건가 싶은 막걸리 예찬이 시작된다.

자신을 풍자하는 해학과 유머도 여전하다. 대화는 한없이 사적이고 이해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 경청하게 된다. 눕는 사람, 절하는 사람, 시간을 가늠할 수없이 빠른 등장과 퇴장의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실제 사생활을 모호하게 차용한다.

이제는 자기 복제라는 말을 들어온 영화 스타일을 어느 순간부터 변주를 주며 실험도 즐긴다. 사뭇 가까워진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고, 신랄한 자기 고백을 시도하며, 초점 나간 시점으로 당황하게 만들지 않나, 동화를 재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홍상수 영화의 백미는 ‘별거 아닌 사소함도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태어나 일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 앞에 작은 의미마저 없다면 삭막한 인생이 될 것 같다. 그래서인지 빠르게 신작을 만드는 홍상수의 다음 작품도 관성처럼 보러 가게 되는 것 같다. 노년의 감독은 또 어떤 이야기를 꺼내들까 은근히 기다려지는 날이다.

평점: ★★★★☆
글: 장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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