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정에서 띄우는 편지 (30)
조연환 제25대 산림청장의 18년째 귀촌 이야기
아침을 먹고 거실과 연결된 데크로 나간다. 데크 등나무 의자에 앉으면 녹우정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녹우정 명당 중 명당자리다. 봉황을 닮은 앞산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든다. 저마다의 향기와 빛깔로 몸치장하기 바쁘던 앞산 나무들이 짙은 초록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오고 있다.
녹우정에 봄이 익어간다.ⓒ조연환
한 달 전 전정을 해 준 소나무 순이 세차게 자란다. 으아리가 하얀 꽃을 피운다. 영산홍은 절정을 지나고 있다. 모란은 가고 작약이 꽃대를 뽑아 올리고 있다. 층층나무의 탐스러운 꽃다발이 층층이 가득하다. 마로니에도 연미색 등불을 밝히고 있다. 노란 목련이 떠나기 아쉬운 듯 꽃송이 몇 개 달고 하늘을 바라본다. 찔레꽃이 피기 시작한다. 장미도 곧 꽃을 피울 모양이다. 매실나무, 개복숭아, 자두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꽃 진 자리에 어린애 젖꼭지 같은 열매가 조롱조롱 달린다.
으아리꽃과 찔레꽃 익어간다.ⓒ조연환
아내와 데크 등나무 의자에 앉아 꽃밭을 바라보며 모닝커피 한잔 하는 이 시간이 가장 여유롭고 행복하다.
“오늘은 뭘 하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마님께서 지시를 내려야 머슴이 일을 하죠.”
“머슴이 알아서 해야지, 머슴살이 몇 년 짼 데 아직도 작업 지시를 받아서 일을 해요…”
아내의 꾸중도 살갑게 다가온다. 커피잔을 들고 텃밭으로 나선다.
올해는 마늘 농사가 참 잘 되었다. 씨 마늘 2접을 심었는데 족히 10접은 캘 것 같다. 명주 이장이 와 보곤 청장네 마늘 농사가 잘됐다고 부러워(?)한다. 명주 이장도 바로 앞 땅에 마늘 5접을 심었다. 아내와 명주 이장은 말은 안 해도 누가 누가 마늘 농사 잘 짓나 시합하는 듯하다. 아내가 말한다. “여보, 우리 마늘이 이장네 마늘 보다 더 잘 됐어요” 내가 보기에도 우리 마늘이 더 좋은 것 같다. 곡식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는데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걸 어이 모르겠는가…
마늘 농사가 잘 됐다. ⓒ조연환
감자는 싹이 드문드문 났다. 싹이 나지 않은 곳을 파보니 씨감자가 썩었다. ‘두백’이란 씨감자를 심었는데 성적이 좋지 않다. 작은 씨감자를 반으로 자르지 말고 통감자로 심을 걸 그랬나 싶다. 감자 싹이 나지 않은 곳에 감자 콩을 심었다. 이제 곧 감자꽃도 필 것이다. 하늘나라 먼저 가신 둘째 누님을 닮은 감자꽃이 기다려진다.
감자가 드문드문 싹이 났다. 감자싹이 나지 않은 곳에 감자콩을 심었다.ⓒ조연환
옥수수도 두 번째 심었다. 대학 찰옥수수와 재래종 자주색 옥수수를 심는데 자주색 옥수수를 더 좋아한다. 옥수수는 4월 중순부터 하지 무렵까지 일주일 간격으로 스무 알 정도씩 심으면 여름 내내 달콤하고 찰진 옥수수 맛을 볼 수 있다. 아침 압력밥솥에 계란,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넣어 밥을 짓는다. 시골 맛이 바로 이런 맛이다.
녹우정 농사 중 으뜸은 고추 농사다. 가장 많은 양을 심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손이 가기도 한다. 농약을 조금이라도 덜 치고 햇볕에 말려 태양초를 하는 재미로 고추 농사를 짓는다. 작년에는 고추 180포기를 심어 태양초 60근을 했다.
녹우정 농사 중 으뜸은 고추 농사다.심었다.ⓒ조연환
이렇게 지은 고춧가루로 김장을 하고 일 년 내 내 양념으로 쓴다. 고춧가루를 쓸 때마다 아내는 우리 고춧가루 빛깔이 참 곱다고 이런 고춧가루는 볼 수 없다고 자랑한다. 작은 지퍼백에 고춧가루를 담아 몇몇 지인께 선물도 했다.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몇 근씩 팔기도 하는 것 같다. 녹우정 표 고춧가루는 시세보다 비싸다. 그런데도 녹우정 표 고춧가루를 사는 사람이 있는가 보다. 그게 어디 고춧가루값이랴…
“여보, 올해 고추 몇 포기 심을까요. 100포기만 심을까요?” 아내가 묻는다. “100포기 심으나 180포기 심으나 일은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작년만큼은 심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내가 고추 100포기만 심겠다는 건 무릎 약한 머슴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100포기를 심으나 180포기를 심으나 약 치고 물 주는 일은 별 차이가 없다. 건조기가 없으니 더 많이 심으면 고추 말리기 어려운 게 문제다.
아내와 논의 끝에 올해도 고추 180포기를 심기로 했다. 일반고추 170포기와 청양고추 10포기를 주문했다. 작년에는 고추 이랑이 좁아 고생했다. 명주 이장이 관리기로 만들어 준 이랑을 헐어 더 넓히고 50센티미터 간격으로 고추 심을 구덩이를 뚫고 물을 붓고 고추를 심었다.
아내는 깊이 심으면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한다. “그래도 내가 농고 실습 장학생 출신이라니까…” 나는 걱정 말라고 큰소리친다. 한 줄씩 맡아서 고추를 심어 누가 심은 고추가 더 잘 자라는지 보자고 했다. 마침 명주 이장이 왔다.
“아직 고추 심기 좀 이른 거 아녀”
“좀 이른거 같긴 한데 오늘뿐이 시간이 안 나네요”
“왜, 어디 가”
“예, 다음 주에는 여기저기 일이 많아요”
“그려, 청장은 아직 바빠야지….”
청장이 고추를 잘 심는지 명주이장이 감독을 하고 있다.ⓒ조연환
아내와 정성 다해 고추 180포기를 심었다. 비료도 듬뿍 넣어 주고 물도 충분히 주었으니 잘 자라 줄 것이다. 올해도 태양초 60근을 하는 게 목표다. 낼부터 비바람이 분다고 아내가 걱정한다. 며칠 집을 비우는 사이 행여 고추 모가 넘어질세라 아내는 고추 줄을 매어준다. 이런 정성으로 녹우정 고추는 올해도 풍작을 이룰 것이다.
고추 심기를 마치니 때맞춰 비가 내린다.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다. 고추 모들이 춤을 추는 듯하다. 어디 고추 모뿐이랴. 송학가루 뒤집어쓰고 목말라하던 나무와 꽃들이 긴 목을 빼고 하늘에서 주는 빗물로 목욕한다. 녹우정은 싱그러운 봄 동산이다.
아내와 정성 다해 고추 180포기를 심었다.ⓒ조연환
고추 심느라 고생했다면 아내가 고기를 굽자고 한다. 그릴에 숯불을 피우고 녹우정 표 고추장삼겹살을 굽는다. 빗줄기를 타고 고기 굽는 냄새가 퍼진다. 오월이네 식구가 우르르 모여든다. 아내는 텃밭에 내려가 꽃보다 예쁘게 자라는 상추를 따온다. 노릇노릇 구운 고추장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아내 입에 넣어 준다. “여보, 수고했어요. 올해도 고추 농사 잘 지어 봅시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고추가 춤을 춘다.
오월이네 가족.ⓒ조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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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조연환
- 출판
- 뜨란
- 발매
- 2018.05.20.
▼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녹우정에서 띄우는 편지’연재▼
29. ‘나무 심은 사람’ 故민병갈 천리포수목원장님을 그리며~
https://blog.naver.com/nong-up/223430404908
글 = 조연환(전 산림청장)
정리 = 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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