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적인 성 역할’은 대개 고리타분한 것으로 인식된다.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전통사회에서나 통용되던 이념이나 관습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서 종종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실과 맞지 않는 생각은 대개 폐해를 낳는다. ‘전통적 성 역할’로 인해 남성의 자살 위험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 또한 그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엘스비어(Elsevier)가 발행하는 오픈 액세스 다학제 저널 「헬리온(Heliyon)」에 게재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인 남성의 이미지’에 부응하려 하는 사람일수록 자살률이 높게 나타났다.
남성 자살 위험과 전통적 이념의 관계
전 세계적으로 남성의 자살률은 여성에 비해 적게는 2배, 많게는 4배까지 높게 나타난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 심리학과 연구팀이 진행한 프로젝트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 결과 남성의 자살 위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문화적 요인을 확인했다.
연구팀이 확인한 요인은 ‘전통적인 남성성 이념’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독립성, 감정 조절, 취약성 은폐 등이 대표적인 세부 요인이다. 이는 과거 가부장적이었던 사회적 프레임으로부터 이어져 왔던 행동규범들이다. 미국에서 약 1만 명의 젊은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한 장기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인 남성적 역할에 강하게 공감하는 사람은 이후 20년 동안 자살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취리히 대학 연구팀은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독일어권 국가에서 약 500명의 남성을 모집했다. 참여자들은 우울증 증상, 전통적인 남성성 이념에 대한 공감이나 순응 여부, 자살 생각 및 행동에 대한 평가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설문지를 작성했다.
연구팀은 설문 결과를 통해 참가자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120여 명이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는 점, 5분의 1에 해당하는 100여 명이 심리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는 점, 13%에 해당하는 65명 가량은 이미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전통적 이념 공감 여부에 따른 구분
다만, 연구팀은 참여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부터 신뢰성을 자체적으로 검증하고자 했다. 모집 당시 알려진 연구 주제에 관한 정보 등은 ‘이미 정신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필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팀은 우울증 및 심리치료와 관련된 데이터는 ‘모집단으로서 대표성이 부족할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비해 연구팀은 ‘전통적인 남성성 이념’에 대한 데이터는 이와 별개라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참가자 전체를 총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은 전통적인 남성성에 공감하거나 순응을 표하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 그룹을 ‘평등주의자 그룹’으로 명명했다. 전체 참가자의 약 60%를 차지했다.
두 번째 그룹은 가부장적 프레임에서 나타나는 남성성의 모습을 보였다. 전체 참가자의 약 15%를 차지하는 이들은 가능한 많은 성적 파트너를 갖는 것, 보다 많은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인식되는 것을 중요하게 보았다. 연구팀은 이 그룹을 ‘플레이어 그룹’으로 명명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전통적 남성성이라는 이념을 강력하게 준수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만 이들은 플레이어 그룹과 달리, 성적인 영역이 아닌 감정 조절이나 독립성, 대범함 등에 주목했다. 익스트림 스포츠 등 높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들을 ‘스토아 그룹’으로 명명했다.
‘전통적 태도’가 자살로 이어지는 이유
위와 같이 분류한 그룹을 기준으로 설문 평가를 진행한 결과, 스토아 그룹은 평등주의자 그룹에 비해 자살 시도 위험이 2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반면, 플레이어 그룹은 위험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이번 연구결과의 제 1저자를 맡은 박사과정 연구원 루카스 에겐버거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등 정신건강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스토아 그룹의 태도는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이야기했다. 에겐버거는 “그들은 ‘나는 내 감정을 보여줄 수 없고, 내 문제는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해’라는 식의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에겐버거의 설명에 따르면 스토아 그룹은 전형적으로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려는 높은 의지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때때로 한 가지 문제에만 몰두해 다른 것들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는 ‘터널 비전(tunnel vision)’ 효과를 일으킨다. 하나의 문제에 매몰된 나머지 자살을 ‘유일한 탈출구’로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스토아 그룹이 다른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것이 ‘전통적 태도가 중장년, 혹은 노년 세대 등 특정한 세대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근거’라고 보았다.
규모 크지 않지만 전 세계적 일반화 가능
독일어권 국가에 한정해 500명의 비교적 적은 인원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여겨볼 가치는 충분해보인다.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남성성’이라는 주제 안에 포함된 감정 은폐와 조절, 철저한 독립성 등 세부적인 내용들은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든 비슷하게 나타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바뀌면 이념도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성 역할에 대한 관념은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성 역할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파시킬 수 있는가? 이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또한, 여전히 전통적 성 역할을 중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건강한 감정 표현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이들로 하여금 필요할 때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도 갖춰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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