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우리가 알고 있기로, 기억이란 먼저 ‘단기 기억’으로 형성된 다음, 그것을 반복해서 학습하거나 특정한 감정적 경험이 더해짐에 따라 장기 기억으로 넘어간다. 단기 기억은 약 20~30초 정도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 부를 만한 대부분의 정보들은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단기 기억을 거치지 않고 장기 기억이 형성되는 경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치매와 같이 기억이 소실되는 퇴행성 질환을 이해하는 일, 뇌 손상에 대한 재활을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일에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기억의 형성과 재활용
일반적으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특정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서 저장하는 ‘인코딩(Encoding)’ 과정을 거친다. 이때 주의력과 집중력이 중요하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정보는 대개 기억에 남지 않으며,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기억과 연결할 수 있는 정보가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인코딩된 정보는 처음에 ‘단기 기억 영역’에 저장된다. 하지만 이 곳에 저장된 정보는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계속 그 위에 덮어쓰게 되며 잊히게 된다. 새로운 정보가 없더라도 보통 몇 분 정도면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기 위한 ‘저장(Storage)’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해당 정보를 반복해서 인코딩하거나 특정한 감정과 연결짓는 방법 등이 활용된다.
장기 기억에 저장된 정보는 필요한 시점이 왔을 때 ‘인출(Retrieval)’하게 된다. 이때 저장된 정보를 다시 꺼내보면, 그것이 정확하게 저장됐는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보통 학습의 결과를 판단할 때를 떠올리지만, 일상에서의 기억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누군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거나, 특정 시간이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이때 충분히 많은 반복을 한 정보이거나, 개인적으로 강렬한 감정을 느꼈던 정보라면 며칠, 몇 달은 물론 몇 년 동안도 기억하게 된다.
단기 기억을 건너뛴 장기 기억?
이러한 기억 형성 과정은 ‘단기 기억 → 저장 → 장기 기억’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무조건 단기 기억을 먼저 거친 뒤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는 직렬적, 선형적(linear) 구조다. 하지만 최근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막스 플랑크 신경과학 연구소의 연구팀이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단기 기억을 건너뛰고 장기 기억이 형성되는 경로가 있다는 근거가 있다.
연구팀은 ‘CaMKⅡ’라는 신경세포(뉴런)의 특정 효소에 주목했다. 이는 단기 기억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효소다. 연구팀은 과거 빛을 비춰서 CaMKⅡ 효소를 일시적으로 비활성화하는 방법을 개발한 바 있다. 이를 활용해 연구팀은 쥐 모델에서 단기 기억 형성을 차단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쥐는 어두운 공간을 선호한다. 만약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있다면, 쥐는 어두운 곳을 선택해 들어간다. 하지만 만약 쥐에게 어두운 공간과 관련해 무서운 기억을 심어주면 어떨까? 아마 어두운 공간을 선호하는 습성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연구팀은 빛을 이용해 CaMKⅡ 효소를 차단한 다음, 쥐로 하여금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게 했다. 그런 다음 행동을 관찰하자, 아무렇지 않은 듯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연구팀이 부여한 공포스러운 경험이 쥐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하루, 일주일, 한 달 후까지 지속적으로 관찰한 결과, 해당 쥐는 어두운 장소를 피하는 행동 패턴을 보였다. 공포 경험을 했던 한 시간 뒤에는 아무렇지 않았다가 시간이 지난 다음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단기 기억을 형성하지 않았다가 장기 기억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확한 근거로 보았다.
이번 연구의 수석 저자를 맡은 신명은 박사는 “단기 기억 없이 장기 기억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실험을 반복하고 그 결과를 여러 방법으로 검증하면서 확신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즉, 단기 기억을 거치지 않고 장기 기억을 형성하는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 기억 형성 과정이 선형적 구조가 아닌 둘 이상의 병렬 구조로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인지 장애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
기억의 형성과 장기 기억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받아들인 정보 중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거나 중요한 것 위주로 기억하게 되고, 이를 토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즉, 기억은 ‘한 개인을 정의하는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 질환이 두려움을 사는 이유 또한 그 사람의 존재를 특정하는 데 있어 기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의 결과는 치매 등 질환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영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치매의 가장 대표적 유형인 알츠하이머의 경우, 뇌에 특정 단백질이 축적되면서 신경세포가 손상되는 질환이다. 이로 인해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 모두가 영향을 받지만, 특히 단기 기억의 손상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알츠하이머 환자는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가 확대 적용된다면, 단기 기억을 거치지 않고 장기 기억이 형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알츠하이머 환자 역시 새로운 기억을 형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 메커니즘에 주목한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거나, 기존 치료법에 이 메커니즘이 반영된다면,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서도 새로운 경험이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알츠하이머 뿐만 아니라, 다른 인지 장애에도 적용할 수 있다. 혹은 뇌졸중이나 외상 등으로 인해 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뇌 손상 환자들의 경우 종종 단기 기억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있다. 장기 기억을 곧장 형성하는 경로를 활용한다면, 이들의 재활 역시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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