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깬 ‘철의 원칙’, 왜 한국이었나
미군이 창설 이후 처음으로 자국 군용기의 핵심 부품인 엔진을 외국에서 정비하기로 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한국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전투기와 헬리콥터의 엔진만큼은 자국 내에서만 분해·정비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가장 가까운 동맹인 일본과 영국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영역이다. 이 원칙을 깨고 한국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단순한 정비 계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군수관리관 이갑수는 “미국이 핵심 부품을 제3국에서 분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이번 결정은 역사적으로도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이 단순한 동맹국을 넘어, 미군의 군수 유지 체계에서 전략적 파트너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만든 수요 폭발
미국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다. 서방이 제공한 무기들이 전장에서 빠른 속도로 손상되면서, 이를 모두 미국이 책임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붕괴가 겹치면서 미군 항공기 가동률은 10% 이상 떨어졌다.
결국 미군은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에 정비 업무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갑수 관리관은 “급변하는 안보 환경과 불안정한 공급망 때문에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동맹국의 군수 역량을 활용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보유한 방산 기술력과 안정적 산업 기반은 이러한 요구에 완벽히 부합했다.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고치는 것이 돈 된다
방산 업계에서는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고치는 것’에서 더 큰 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기 체계의 생애주기 비용을 보면 도입 비용은 전체의 30~40%에 불과하고, 나머지 60~70%가 정비와 유지에서 나온다. 고가 장비를 20년 이상 운용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정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관리관은 “무기를 생산하는 데는 재료비와 초기 비용이 많이 들지만, 정비는 축적된 기술이 핵심이어서 훨씬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한국이 이번 RSF 협력으로 발판을 마련하면 단순한 무기 판매를 넘어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시누크 헬기와 F-16 전투기 정비 경험이 쌓이면, 인도·태평양 전체 미군 장비의 MRO(정비·수리·점검)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도 이어받은 유일한 바이든 정책
흥미로운 점은 이 협력이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던 트럼프 행정부조차 RSF를 유지·확대했다. 전임 정부의 정책을 철저히 뒤집었던 트럼프가 유일하게 계승한 정책이 바로 RSF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RSF가 단순한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미국의 국가 안보와 직결된 실리적 선택임을 의미한다. 방산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전투기와 같은 고가 장비는 생산 물량 자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미국이 생산보다 유지·보수에 무게를 두는 것은 당연한 전략적 판단”이라고 분석했다.
한국 방산업계와 한미동맹의 새로운 도약
RSF 참여는 한국 방산업계에 또 다른 성장 동력이자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 한국이 미군 장비의 정비를 맡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넘어, 미국이 요구하는 동맹 기여 방식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군 대표단은 최근 거제, 창원, 울산, 구미 등 주요 방산 거점을 실사하며 한국 기업들의 역량을 점검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이 신뢰를 얻는다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안정적으로 이어질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전망이다. 더 나아가 이는 한국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으며, 한미동맹을 ‘군사 작전 중심’에서 ‘산업 협력 중심’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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