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 주위에 포진이 생기는 ‘헤르페스’는 비교적 흔한 바이러스다. 보통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치유되기도 하고, 병원에 가면 더 빠르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최근 영국 의학 저널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계보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에 따르면 헤르페스는 1형부터 8형까지 다양한 종류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가볍게 여기는 헤르페스는 ‘구순 단순포진’을 일으키는 제 1형(HSV-1)이며, 다른 종류로 갈수록 성기 포진, 거대세포 바이러스, 면역세포 증식 등 심각한 질환으로 이어진다.
이들과 같은 ‘계통’ 안에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다. 수두와 대상포진은 헤르페스와 서로 다른 질환이지만, 바이러스 차원의 분류에서 보면 ‘헤르페스 바이러스과’로 묶을 수 있다.
대상포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대상포진 바이러스는 ‘신경계에 잠복’한다. 바꿔 말하면, 헤르페스 계통에 해당하는 바이러스들은 모두 신경계에 잠복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경절에 숨어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틈을 노려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헤르페스 바이러스와 알츠하이머
지난 1월,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미국 터프츠 대학에서 진행한 공동 연구에서는 ‘머리 부분의 외상’이 신경 퇴행성 질환 위험을 높인다는 내용의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입술 및 주변부 포진을 일으키는 HSV-1은 통계적으로 80% 이상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평상시 잠복해 있다가 기회가 있을 때 신경계로 침투해 문제를 일으킨다.
지난 4월 초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미국 스탠포드 의대 주도의 연구에서는 대상포진 백신을 접종할 경우 치매 발생 가능성을 20% 낮춘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백신을 접종한 시점으로부터 약 7년간의 추적 관찰을 수행했으며, 이후 약 2년에 걸쳐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신빙성을 얻었다.
이로부터 며칠 뒤, 국내 연구팀에서도 같은 맥락의 연구가 발표됐다. 고려대 의대 및 동아대 의대 연구팀이 HSV-1 감염으로 뇌의 면역세포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 사례들은 모두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신경계통에 영향을 미치는 바이러스는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잠복 바이러스의 뇌 건강 위협
알츠하이머와 관련된 연구에서 헤르페스와 같은 신경계 바이러스를 주목하는 포인트는 ‘잠복과 재활성화’에 있다. 이번에 영국 의학 저널을 통해 발표된 연구에서는 HSV-1의 영향과 함께 ‘항헤르페스 약물’의 잠재적 보호 효과에 초점을 맞췄다.
연구팀은 2006년부터 2021년 사이에 미국에서 이루어진 행정 청구 데이터를 활용했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사람들과 신경계 질환 병력이 없는 사람들을 각각 하나씩 대조해 약 34만5천 쌍을 분석했다.
그 결과,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사람 중에는 HSV-1를 진단받은 사람이 약 1,500명, 건강한 사람들 중에는 HSV-1를 진단받은 사람이 약 820명으로 나타났다. 검토한 전체 인원 수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지만, 비율로 따지면 알츠하이머 환자의 HSV-1 진단 사례가 약 2배 가량 많았다.
이 전체 인원 중 약 40%는 항헤르페스 약물을 복용했다. 약물을 복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교한 결과, 항헤르페스 약물을 복용한 사람의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이 17% 가량 낮았다.
신경계통 바이러스에 유의
연구팀은 이런 식으로 HSV-2(성기 포진 바이러스),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 거대 세포 바이러스 등 다른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그 결과, HSV-2와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는 모두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에 발표됐던 연구 사례들을 다시 한 번 뒷받침하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연구팀은 이러한 바이러스들이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을 높이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애당초 알츠하이머의 정확한 발병 기전 자체가 여전히 연구 중인 영역이니, 앞으로도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하는 접근 방향에 대해서는 머지 않아 결론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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