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것이 심혈관 질환의 위험과 연관이 있을까? 글쎄, 얼핏 생각해도 그다지 연결고리가 없어보인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념이 아닌가 싶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실제 건강 관련 요인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수 있을까? 또, 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연구 사례가 공개됐다. 「자마 네트워크 오픈(JAMA Network Open)」에 게재된 시카고 대학의 연구에는 남성성과 심혈관 질환 위험이라는 두 키워드를 묶어 분석한 결과가 담겨있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남성성’
시카고 대학 연구팀은 ‘고정관념적인 성별 규범’에 주목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성 역할’이나 ‘성 정체성’과 같은 개념이다.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자면, “남자가 되서 아프다고 징징거리냐”, “남자답게 울음을 꾹 참아라”라는 말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말들 중에는 이런 종류의 것은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다. 누군가 정해준 것도 아니고, 정답이라고 규정한 것도 아니지만, 오랜 시간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형성돼 온 일종의 ‘고정관념’ 말이다.
사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기존에 진행됐던 연구에서는 남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압박’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남성들에게서 약물을 사용하거나 치료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을 밝힌 바 있었다.
병원 잘 안 가는 남성, 왜 그럴까?
시카고 대학 의료센터(UChicago Medicine)의 일반 내과의이자 소아과 의사인 나다니엘 글래서 박사는 이번 연구의 주 저자로서 기존에 진행됐던 연구의 한계를 언급했다. ‘남성들이 병원을 잘 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라는 것은 밝혀냈지만, 왜 그런 경향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글래서 박사는 “남성 혹은 남성성이 강한 사람들이 정신건강 및 1차 진료가 필요한 시점에 병원을 찾는 빈도가 낮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고 말하며, “이전 연구에서는 ‘남성성’이 형성되는 사회적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했다.
즉, 시카고 대학 연구팀이 이번 연구에서 먼저 초점을 맞춘 것은 ‘남성성’이 형성되는 배경이다. 그 다음으로 선택한 키워드가 ‘심혈관 질환’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위험 요인을 축적해오는 질환이자, 주된 사망원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으로 형성된 남성성과 만성 질환 예방을 위한 활동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글래서 박사와 연구팀은 1994년부터 2018년까지 24년에 걸쳐 12,3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는 미국의 전국 단위 종단 연구인 Add Health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로, 개인의 사회적 성향을 비롯해 건강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고정관념적 남성, 건강 응답 잘 하지 않아
연구팀은 참가자들이 응답한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가장 다르게 답변한’ 설문 항목을 추려냈다. 여성들의 답변과 남성들의 답변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두드러지는 질문을 추려낸 것이다. 그런 다음, 해당 질문 항목에 대해 남성 참가자들이 답변한 내용들만을 취합하여 비교·분석했다.
남성들 사이에서도 성향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나타낸다. 누군가는 고정관념이 드러나는 보수적인 표현을 많이 하고, 누군가는 시대적 트렌드를 고려한 개방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연구팀은 분석 결과를 통해 ‘남성들의 표현법’에 대한 정량화된 데이터를 얻고자 했다.
글래서 박사는 “Y염색체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생리적인 것은 배제했다”라며 “자기 보고 행동, 선호도, 신념 등 사회적 요인에 주목했으며, 이것이 같은 성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유사하게 나타나는지에 집중했다”라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연구팀은 ‘심혈관 질환’에 초점을 맞춘 분석을 진행했다. Add Health에 포함된 건강 지표 측정 결과와 참가자들이 작성한 건강 관련 설문 응답을 대조했다. 이를 통해 고혈압 등 심혈관 질환의 위험 요인을 가진 남성들이, 그에 대한 진단 또는 치료를 받았는지를 살폈다.
연구 결과, ‘보다 고정관념적·보수적으로 응답한 남성’들의 경우, 진단이나 치료에 관한 응답을 잘 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다. 심혈관 질환 위험 요인에 관한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적 있다고 응답한 사례도 적었고, 치료를 받거나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고 응답한 건수도 마찬가지였다.
단, 이 결과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심혈관 질환 위험 요인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응답하지 않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순히 검진 자체를 받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검진을 받았지만 그 결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혹은 진단 내용을 잘 알거나 치료를 받고 있지만, 다른 이유로 그것을 숨기는 것일 수도 있다.
‘사회적 성향’에 따라 건강 행동 달라져
이유가 무엇이든, 겉으로 드러난 사실은 정리해볼 수 있다. 고정관념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남성들의 경우, 자신의 건강 상태에 관해 명확히 응답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토대로 ‘사회적으로 부여된 남성성’으로 인해, 자신의 건강 상태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결론을 내렸다.
글래서 박사는 “우리의 가설은 ‘사회적 정체성’ 또는 ‘사회적 압력’이 실제 행동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심혈관 위험 요인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 연구결과는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건강 상태에 관한 응답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추가 연구 및 분석이 필요하다. 단순히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충분히 관심을 갖고 관리하고 있지만 단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인지가 밝혀진다면 보다 정확한 추정이 가능해질 것이다.
연구팀은 더 넓게 봤을 때, 이번 연구가 단순히 ‘전통적 남성성’이라는 주제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남성성을 타깃으로 놓고 분석을 진행했을 뿐, 다른 특성을 중점에 놓고 본다면 발견할 수 있는 시사점이 더 있을 것이다.
글래서 박사는 “우리는 성별, 인종, 성적 정체성 또는 다른 요소에 근거한 사회적 성향이 강요되는 상황일 때, 건강과 관련된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목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연구는 미국 사회를 대상으로 진행된 것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번 연구의 대상이 된 남성성과 같이 ‘사회적 성향’ 또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은 우리 사회에도 빈번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가 부여한 것들로 인해 건강과 같은 나 자신을 위한 중요한 것들이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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