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 28위, 1조5천억 매출…‘제2의 현대건설’이라 불린 거평그룹의 몰락 이유
거평그룹은 1979년 나승렬 회장이 금성주택을 창업한 이래, 부동산 호황의 파도를 타고 단 18년 만에 재계 순위 28위에 오르는 신화를 썼다. 1996년에는 매출 1조 5천억 원을 올릴 만큼 한국 건설·유통 업계의 중심에 있었으며, ‘제2의 현대건설’로 불릴 정도로 성장세가 돋보였다. 그러나 거평그룹은 금융위기 한 번에 한순간에 기업 해체와 몰락의 길을 걸었다.

평범한 시작, 대기업 도약의 배경
창업주 나승렬 회장은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어렵고 소박한 개인 배경을 갖고 있었다. 1967년 서울로 상경해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삼강산업 등에서 경력을 쌓았고, 1979년 금성주택을 설립해 부동산 호황과 함께 급격한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 특히 1988년 서초구 센츄리 오피스텔 분양 성공 이후 거평건설은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공격적 M&A의 어두운 그림자
거평그룹의 성장 동력은 ‘공격적 인수합병(M&A)’ 전략이다. 나승렬 회장은 우량 기업을 인수한 뒤 기존 자산을 활용해 또 다른 기업을 계속 사들이는 방식으로, 계열사를 22개까지 늘렸다. 대한중석, 포스코켐, 태평양패션, 새한종합금융 등 주요 인수기업들은 당시 업계에서 주목받았다. 강력한 자산 활용과 확장성 있는 사업 구조로 기업 덩치를 키우는 데 성공했다.

패션타운 ‘거평프레야’ 신화와 화려함
1992년, 동대문 덕수중·덕수고 부지 인수를 통해 ‘거평프레야’(현 두타)라는 패션타운을 개장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고급화했다. 이는 거평그룹을 단순 건설그룹에서 복합 유통·패션 그룹으로 포지셔닝하는 계기가 됐다.
IMF 외환위기, 몰락의 신호탄
1997년 한국 경제를 강타한 IMF 외환위기는 거평그룹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내실 없이 공격적으로 성장한 탓에 견고한 재무구조를 갖추지 못했고, 고금리 대출, 신규자금 축소, 급격한 자금회수 등 금융환경 변화에 바로 타격을 입었다. 부동산 경기 침체는 거평의 주수입원을 차단해 그룹 전 사업이 동시다발적으로 흔들리는 결정적 약점이 됐다.

자발적 구조조정과 그룹 해체
결국 1998년 5월, 거평그룹은 19개 계열사 중 4개만 남기고 15개를 부도 처리하며 사실상 그룹 해체를 선언했다. 2조 원에 가까운 매출에도 불구하고 이익은 200억 원 수준으로 급감했고, 급작스러운 부채 압박에 견딜 수 없었다.
거평그룹, 한국 경제사가 남긴 교훈
거평그룹의 몰락은 무리한 사업 확장, 부동산 시장 의존, 취약한 재무구조 등 기업 경영의 위험요소가 현실화되면 한순간에 대기업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업의 내실 경영, 리스크 관리, 시장 변화 대응력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각 기업, 경영자에게 유효한 교훈으로 남는다. 장기적 성장과 생존을 위해선 외형확장보다 내실, 자산수지, 위기관리 역량을 선제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거평그룹은 단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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