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대가 싫다”…그가 뛰어넘은 선
1991년 3월 1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를 서던 카투사 김유찬 일병은 군사분계선을 향해 갑자기 전력질주했다. 성균관대 체육교육과 4학년이던 그는 JSA 배치 한 달도 안 돼, 방탄모·선글라스·권총을 찬 채 북측 휴게실 방향으로 달려 들어가 정전협정 이후 JSA 최초 국군 월북자가 됐다.

“멈춰!” 외침 뒤에 실제 총성이 터졌다
김 일병이 북쪽으로 치닫자 남측 경비병들이 제지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남북 경비병 사이에 실탄이 오가는 짧은 교전까지 벌어졌다. 총성이 울리는 혼란 속에서도 그는 끝내 북측 병력 쪽으로 몸을 던졌고, 북한군은 그를 엄호하며 북측 지역으로 데려갔다. 이 사건 이후 JSA 경계 태세는 크게 강화됐고, 사병들이 장교복을 입고 휴가·외출을 나가게 하는 등 각종 재발 방지 조치가 뒤따랐다.
왜 갔는지, 끝내 ‘불명확’
월북 직후 군 안팎에선 가정사, 애인 문제, 운동권 이력, 군 복무 스트레스 등 온갖 추측이 쏟아졌다. 같은 시기 근무했던 동료들은 “집안 문제 때문으로 안다”고 증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끝내 확인되지 않았고 공식 기록상 동기는 ‘불명확’으로 남았다. 나중에 평양 라디오에 나온 김유찬은 “한국군의 고된 군 생활에 환멸을 느껴 월북했다”고 주장했지만, 북한 선전용 멘트 성격이 강해 실제 속내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북한이 만들어 준 ‘월북용사 김유찬 쇼’
북한은 그를 곧바로 체제 선전의 얼굴로 내세웠다. “월북용사 김유찬을 열렬히 환영!”이라는 문구가 적힌 대남 전단이 남측에 살포됐고, 평양에서 군복 차림으로 환영 인파 앞에 손을 흔드는 사진이 선전물에 실렸다. 전단 뒷면에는 “전 연합국군 공동경비대 4소대 일병 김유찬, 1991년 3월 1일 월북”이라는 소개와 함께 한국군 생활의 부조리를 비난하는 글이 이어졌다.

군관·결혼…그래도 자유는 없었다
나무위키·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유찬은 북한에서 결혼해 자녀를 두고, 조선인민군 군관 계급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에도 대남 삐라에 실제 군복을 입은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했으며, 설명에는 “전 유엔군사령부 공동경비중대 일병, 조선인민군 군관 김유찬”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겉으로는 계급·가족·직업이 보장된 것처럼 보여도, 이는 체제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 관리·통제된 선전용 “우대”에 가깝다.

25년 뒤에도 삐라에 찍힌 얼굴
사건 발생 25년이 훌쩍 지난 뒤에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선전물에 살아 있었다. 2016년 서울 시내에서 회수된 대남 전단에는 인민군 군관복을 입은 김유찬의 사진이 인쇄돼 있었고, 북한은 그를 여전히 “월북용사”로 포장하고 있었다. 한 번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월북 카투사’ 이미지는, 수십 년 동안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서 단골 소재로 재활용되고 있다.

힘든 군 생활 대신 선택한 건…더 큰 감옥
오늘날까지 그의 생사와 생활상은 외부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건, 일시적인 군 생활의 고통을 피하려다 더 폐쇄적이고 통제된 체제에 평생을 묶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남쪽에 남았다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학업·직업·거주·이동의 자유는 사라졌고, 이름과 얼굴은 북한이 필요로 할 때마다 불려 나오는 선전 도구로만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의 월북은 “군대가 싫어서 택한 길이 결국 더 큰 감옥이었다”는 경고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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