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은 모두 알지만, 그 하루 전 새벽에 영덕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는 분은 드뭅니다.
영덕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 자료와 위키백과·정책브리핑을 토대로, 1950년 9월 14일 새벽의 5가지 사실을 정리했습니다.

인천상륙 하루 전, 영덕 장사 해변에 LST가 닿았다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경북 영덕 장사 해변에 LST 문산호가 닿았습니다. 작전명 ‘174 작전’. 인천을 향해 북한군의 시선을 동해안으로 끌어당기는 양동(陽動)작전이었습니다.

상륙한 772명 중 다수가 학도병, 평균 17세
독립 제1유격대대 772명이 상륙했는데, 대부분 중·고등학생 출신 학도병이었습니다. 평균 나이가 17세였고, 사전 훈련 기간은 단 2주였습니다. 정규 훈련 없이 총만 쥔 채 적진에 발을 디딘 셈입니다.

LST 문산호 좌초, 퇴로가 끊겼다
태풍의 잔여 풍랑 속에서 문산호는 장사 해변에 좌초했습니다. 상륙은 성공했지만 배는 다시 띄울 수 없었고, 학도병들의 퇴로는 끊겼습니다. 그 상태로 국도 7호선을 차단하고 인민군 보급선을 끊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임무는 양동만이 아니었다 — ‘후방 교란’
공식 작전명령서에 적힌 목적은 단순한 양동을 넘어, 인천상륙 직후 낙동강 반격에 발맞춘 ‘후방 교란’이었습니다. 인민군 보급·증원을 끊어 인천 방향에 묶이게 하는 그림이었습니다.

1997년 갯벌에서 발견된 문산호, 그제야 알려졌다
좌초된 문산호 잔해는 1997년 3월 6일 해병대에 의해 영덕 갯벌에서 발견됐습니다. 그제야 학도병들의 희생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영덕에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47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왜 우린 이제야 이 이름들을 부를까요?
인천이 너무 컸기에, 그 하루 전 영덕은 가려졌습니다. 하지만 인천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17세 학도병들이 동해안에서 인민군의 시선을 끌어준 그 새벽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772명을 기억해야 할 이유입니다.
교과서에 못 실린 그 새벽, 17살들이 대한민국 한 칸을 더 지켜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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