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파워가 70억 원 주고 산 ‘스텔라’ 기술
빌 게이츠가 2008년 설립한 미국 원전 회사 테라파워는 소듐냉각고속로 SFR ‘나트륨(Natrium)’을 개발 중이고, 올해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첫 상업용 SMR 건설 승인을 받았다. 이 회사가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부터 약 70억 원(약 500만 달러) 규모로 사 간 것이 바로 SFR 안전 시험 시설 기술, 즉 스텔라(STELLA)의 설계·제작 노하우와 관련 지식재산권이다. 스텔라는 SFR 원형로의 핵심 안전 계통을 축소 제작한 종합 평가 시설로, 사고 상황을 모의하고 안전성을 검증하는 데 쓰이는 장치다. 테라파워는 자기들이 SFR 안전 검증을 위해 비슷한 유동 실험 장치를 직접 구축해야 해서, 한국의 설계·실험 데이터를 통째로 도입한 셈이다.

왜 하필 SFR, 그리고 왜 한국인가
SFR은 냉각재로 물 대신 액체 소듐(나트륨)을 쓰는 고속로 방식이다. 물보다 열전달 성능이 뛰어나 열효율이 높고, 고압 증기 대신 액체 금속을 써서 구조적으로 안전성이 높은 차세대 원자로로 꼽힌다. 문제는 소듐이 공기·물과 만나면 반응성이 커서, 이를 안전하게 다루고 사고 시 거동을 예측하기 위한 실험·데이터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한국원자력연은 스텔라 설비를 통해 SFR 사고 모의와 열유동(냉각재가 흐르며 열을 어떻게 옮기고 분포하는지)에 대한 상세 데이터를 오랫동안 쌓아 왔다. 테라파워 입장에선 “시간과 위험을 감수하며 처음부터 실험 데이터를 쌓느니, 이미 검증된 한국의 시험 기술과 데이터 패키지를 사 오는 것이 훨씬 빠르고 안전하다”는 선택인 셈이다.

‘미국 SMR 1호’에 들어간 한국의 안전 설계
테라파워의 ‘나트륨’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첫 상업용 SFR 기반 SMR로, 3월에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건설 승인을 통과했다. 이 인허가 과정에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바로 소듐 냉각계의 안전성과 사고 시 거동을 어떻게 입증하느냐였다. 한국원자력연 주한규 원장은 정부 업무보고에서, “테라파워가 인허가를 받는 데 필요한 소듐 냉각장치 설계와 실험 결과에 관한 지재권을 넘겼고, 약 500만 달러 성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테라파워는 11~15일 사이에 직원 10여 명을 한국에 보내, 폭발성이 큰 소듐 처리에 관한 실무 훈련까지 받고 갔다. 미국 차세대 원전의 안전 설계와 인허가 논리 한가운데에 한국의 시험 기술이 들어간 셈이다.
한국은 기술은 있는데… 예산 삭감에 발목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민간 주도로 SFR 개발에 속도를 내는 반면, 이 기술을 팔아준 한국은 정작 예산 문제로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정부가 2025~2028년 290억 원을 투입해 SFR 기반 ‘선진 원자로 수출기반 구축’ 민관 합작 사업을 추진하려 했지만, 국회 심의에서 “원전 카르텔 예산”이라는 비판과 함께 2025년 예산이 70억 원에서 7억 원으로 90% 깎였다. 그 결과 사실상 1년 동안 사업이 멈춰 섰고, 개발 완료 목표도 2028년에서 2029년으로 미뤄졌다. 올해 들어 예산이 다시 70억 원 수준으로 복구되긴 했지만, 그 사이 시간과 인력이 흩어졌다는 점에서 손실이 작지 않다.

‘살루스’로 이어지는 한국의 4세대 원자로 구상
한국원자력연은 이미 2020년에, 사용후핵연료를 태워 없애기 위한 SFR 개념 설계를 마친 경험이 있다. 이 기반 위에서 2021년부터는 SFR을 단순 폐기물 처리용이 아니라, 실제 발전용 4세대 원자로로 전환하는 ‘살루스(SALUS)’ 연구에 들어갔다. 목표는 SFR 기술을 민관 합작으로 고도화해, 차세대 수출형 원자로로 키우는 것이다. 테라파워에 스텔라 기술을 수출한 것도, 장기적으로는 “한국이 SFR 시험·안전 분야의 기준을 만든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행보에 가깝다. 다만 국내 예산과 정책이 이 속도를 따라가 주느냐가 관건이다.
![빌 게이츠 꿈 실현하는 '그곳'… 美테라파워 SMR 개발 현장 가보니[르포] | 중앙일보](https://contents-cdn.viewus.co.kr/image/2026/05/CP-2025-0398/image-2b6e7dba-8fb5-465a-903c-e2c48050a582.jpeg)
“한국 기술이 최고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
테라파워가 수십억 원을 지불해 한국의 SFR 안전 시험 기술을 사 갔다는 사실은, 한국이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세계 최상위 레벨에 있다는 국제적 인증이다. 특히 미국이 자국 차세대 상업용 원자로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핵심 데이터를 한국에서 사 갔다는 점은 상징성이 크다. 문제는 이 기술이 한국 안에서 얼마나 제대로 쓰이고, 얼마나 일관된 투자와 정책 지원을 받느냐다. 지금 흐름대로라면 “한국 기술로 미국 SMR이 먼저 상업화되고, 정작 한국은 뒤늦게 따라가는” 상황이 다시 벌어질 위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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