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장교로 시작해, 한국 공군의 ‘아버지’가 되다
최용덕(1898~1969)은 대한제국 한성에서 태어나 10대 중반에 중국으로 건너가 군인의 길을 택한 인물이다.
15세에 중국으로 넘어가 191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했고, 곧바로 중국군 장교로 임관해 중대장을 맡았다.
이후 공군군관학교에 진학해 비행·정비·지휘 능력을 인정받으며 1920년대 중반에는 중국 공군기지학교 교장까지 올랐다.
중국 항공대 창설에도 참여한 그는, 명목상으로는 전형적인 ‘중국 공군 엘리트 장교’였다.
‘중국군 장교’이면서 동시에 ‘조선 독립운동가’
하지만 최용덕은 중국군 장교로만 머물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들은 그는 불과 스무 살 무렵, 장교직을 내던지고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무기를 공급하는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에 체포됐다가 석방된 뒤 다시 공군비행학교로 복귀했지만, 이후에도 독립운동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활동에 관여하며 폭탄 확보·운반, 김상옥 의거 지원 등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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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선에서 광복군까지 이어진 ‘이중생활’
중국 비행부대 지휘관 신분이 된 뒤에도 그는 북경·천진·안동 일대를 오가며 조선혁명당·대일전선통일동맹 같은 항일조직과 연결을 이어 갔다.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당,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합류해 참모처장 등으로 활동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중국 공군 장교이자 광복군 장교라는, 말 그대로 ‘두 개의 군복’을 동시에 입은 경력도 갖게 된다.
중국군과 임정 사이를 조율하며, 해방 후 한반도에서 쓸 항공 전력의 기반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군정의 저지 속에서 공군 독립을 밀어붙이다
광복 후 1946년 귀국한 최용덕을 맞이한 것은 새로운 상전,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한국에는 당분간 공군이 필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통위부(국방부 전신)를 만들 때 육군·해군만 창설하고 공군은 빼버렸다.
연합군사령부 지침에 따라 한반도 내 항공기는 여의도비행장으로 집결시켜 비행 금지·해체 조치를 내리고, 민간 항공조직도 1945년 말까지 모조리 해산시켰다.
예측 불가능한 한국 공군의 성장을 차단해, 한반도 군사력을 관리 가능한 수준에 묶어두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친일 장교·미군정 사이에서 공군을 만들어낸 사람
이런 환경에서 공군 독립을 밀어붙인 이들이 바로 ‘7인의 공군창설 주역’이었다.
김영환·김정렬·박범집·이근석·이영무·장덕창, 그리고 최용덕이 그들이다.
이 중 일부는 일본군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었고, 해방 직후 군 내부 권력과 인사 구조 역시 친일 장교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최용덕은 독립군·광복군 출신이면서도, 미군정과 친일 장교들이 장악한 권력 구조 속에서 이들과 부딪치며 공군 창설을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묘한 위치에 서 있었다.

“육군 예하 항공대”를 “독립 공군”으로
미군정은 한국군 안에서 항공 전력은 오랫동안 육군 예하 부대로 두자는 입장이었지만, 최용덕과 동료들은 별도의 공군 창설을 목표로 움직였다.
1948년 항공부대 창설, 같은 해 육군 항공기지사령부 출범 등은 모두 독립 공군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군 고문단을 설득하고, 국내 항공 인력·장비를 최대한 긁어모아 “독립 공군을 굴릴 수 있다”는 실적을 쌓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1949년 10월 1일, 해군·육군보다 몇 년 늦었지만, 미국이 보기엔 “아직 이르다”고 할 정도로 빠른 시점에 대한민국 공군이 정식 창설된다.

국산 항공기·공군 정체성까지 잇는 ‘공군의 아버지’
공군 창설 이후 최용덕은 단순 조직 확대를 넘어, 장기적으로 한국이 자체 항공기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기 훈련기·연습기 확보, 정비·제작 인력 육성, 항공기 구조·엔진에 대한 국내 기술 축적 등이 그가 중시한 과제였다.
동시에 공군의 정체성을 일본군 항공대가 아니라, 임시정부·광복군·중국 항일전선의 연장선에 두려는 시각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중국군 장교로 시작해 한국 공군을 만든 이 이력은, 그가 평생 ‘어디 소속이냐’보다 ‘어디를 위해 쓰일 것이냐’를 먼저 생각한 드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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