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일 독립군 장군, 6·25 한강에서 다시 서다
김홍일(1898~1980)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 장교, 한국전쟁 때는 한강 방어전의 야전사령관으로 싸운 인물이다.
황해도 경신학교 교사로 있다가 3·1운동 직전 학생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돼 상하이로 망명했고, 이후 대한의용군사회 등 독립군 조직을 거쳐 중국 국민혁명군에 들어가 사단 참모와 장교 교육을 맡았다.
1937년에는 중국 군관학교 교관으로서 한인 청년 100여 명을 훈련해 조선의용대로 편성, 항일전에 투입했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국내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개전 사흘 만에 소환된 ‘야전 구원투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을 때, 김홍일은 육군참모학교(지금의 보병학교) 교장이었다.
개전 직후 그는 “서울을 조기에 포기하고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당시 국군 지도부는 상황을 오판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이 전선은 붕괴했고, 개전 사흘째인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뒤늦게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때부터 김홍일은 흩어진 병력을 수습해 한강 남쪽에 긴급 방어선을 치는, 말 그대로 ‘구원투수’ 역할을 맡는다.

패잔병으로 24km 한강 방어선을 만든 야전 지휘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6월 25일 9만8천 명이던 국군 병력은 같은 달 말에는 2만2천 명 수준으로 줄어들 정도로 전력이 붕괴돼 있었다.
제6·8사단을 제외한 대부분 부대가 최초 공격에 와해된 가운데, 김홍일은 조직이 남아 있는 병력과 후방·패잔병들을 긁어모아 한강 이남에 약 24km 길이의 방어선을 형성한다.
한강 인도교·철교 폭파로 북한군 도하가 일시 지연되긴 했지만, 6월 30일 새벽부터 북한군은 노량진·여의도·영등포 일대로 전선을 넓히며 집요하게 도강을 시도했다.
김홍일이 지휘한 혼성 방어선은 이 공격을 여러 날 막아냈고, 그 사이 미 제24사단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해 평택·안성 일대에 방어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벌게 된다.
![포토] 춘천지구전투 재연…기습 남침하는 북한군](https://contents-cdn.viewus.co.kr/image/2026/05/CP-2025-0398/image-3482ac33-9960-4148-b77a-dd64e7e23aa0.jpeg)
닷새 동안 인민군을 강 북에 묶어둔 시간
서울은 6월 28일 함락됐지만, 인민군이 실제로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본격 진출한 것은 7월 3일 무렵이다.
바로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닷새 동안, 김홍일이 모아낸 혼성부대가 강변을 지키며 도하 시도를 저지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미 제24사단 스미스부대는 부산 상륙(7월 1일) 이후 철야 기동으로 평택·안성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한강 이남에 도착한 유엔군과 국군 잔존 병력은 이후부터 인민군의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결국 낙동강 방어선 형성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지는 시간표는, 이 닷새 동안의 한강 지연전 위에서 가능해진 셈이다.

백선엽과 다른 길, 그리고 너무 이른 퇴장
서울 함락 전날인 6월 27일, 채병덕 총참모장은 문산지구 제1사단장이던 백선엽 대령에 대한 작전 지도 권한을 김홍일에게 부여했다.
김홍일은 백선엽 부대가 포위망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신속한 한강 이남 후퇴를 제안했지만, 백선엽은 ‘지도권이지 지휘권은 아니다’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후 백선엽은 미군과의 공조 속에서 낙동강·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게 되고, 김홍일은 지원 없이 닷새 동안 대군을 강 북에 묶어 두는 한강 방어전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다.
낙동강 이후 김홍일은 제1군단장으로 승진하지만, 9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 전력이 있는 장교들을 중용하는 인사 구상과 미군과의 마찰 등을 이유로 그를 예편시키고 만다.
김홍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김홍일은 일제시대에는 독립군·광복군 장교, 해방 후에는 한국군 장군, 전쟁 이후에는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살다 1980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한국전쟁 초기 한강 방어전에서 보여준 야전지휘와 지연전 능력은, 수도와 국가의 붕괴를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낙동강과 인천상륙작전, 압록강 진격으로 이어지는 전개 뒤에 가려졌지만, 유엔군 반격의 전제조건이 되는 ‘시간’을 벌어준 인물이 바로 김홍일이었다는 점은 여러 군사사료에서 확인된다.
항일 독립투쟁과 6·25전쟁이라는 두 전장을 모두 경험한 이 노장 장군을 제대로 조명하는 일은, 친일과 독립·전쟁 공로를 둘러싼 한국 현대사의 가치 기준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