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봉지’ 문구에 충격받아 미그기 몰고 탈북… 15억 정착금에도 비극으로 끝난 故 이웅평 대령의 삶

북한의 최신예 전투기 미그-19(MiG-19)를 몰고 목숨을 건 귀순을 감행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고(故) 이웅평 공군 대령의 극적인 탈북 비화와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유튜브 지식·역사 채널 ‘링킹’은 최근 ‘15억 보상금 받은 미그기 타고 귀순한 이웅평’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당시 엘리트 군관이었던 그가 체제 탈출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와 귀순 이후 겪었던 고뇌의 기록을 재조명했다.

북한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공군 제1비행사단 상위(한국군의 중위~대위에 해당)로 복무하던 이웅평은 북한 내에서도 촉망받던 엘리트 비행사였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계기는 원산 앞바다 해안가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남한의 ‘삼양라면’ 쓰레기 봉지였다. 봉지 뒷면에 적힌 “변질·훼손된 물품은 본사 대리점이나 판매점에서 교환·환불해 드립니다”라는 작은 안내 문구가 그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소한 공산품 하나에도 일반 인민(소비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끝까지 책임을 지는 남한 사회의 배려를 목격한 그는, “지상낙원이라 선전하면서도 주민들을 억압과 굶주림에 몰아넣는 북한 체제가 과연 정상적인가”라는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이 작은 라면 봉지 문구가 체제의 실상을 깨닫고 목숨을 건 결단을 내리게 된 결정적 기폭제였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이웅평 상위는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해 초계 비행 훈련을 하던 도중 편대를 이탈해 서해 연평도 상공을 거쳐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미그-19 전투기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남하하자, 전국에는 실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 퍼졌고 라디오와 TV 정규 방송이 일제히 중단되며 “수도경보사령부에서 알립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라는 긴급 방송이 전파를 탔다.
전 국민이 전쟁 발발의 공포에 휩싸였던 일촉즉발의 순간, 전투기를 유도 착륙시킨 수원비행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두 손을 들고 귀순 의사를 밝혔다.
이웅평은 당시 국가 기밀 무기 체계였던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로금(보상금)으로 15억 원을 지급받았다. 1980년대 초반 당시 서울 강남 아파트 수십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북한군 경력을 인정받은 그는 1985년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 임관했다. 이후 합동참모본부와 공군대학 교관 및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며 1996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공군대학 교수의 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며 대한민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듯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삶 이면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자신이 남쪽으로 넘어온 대가로 북한에 남아 있던 부모와 형제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참혹한 처형과 고초를 겪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는 평생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북한 보위부가 암살조를 파견해 독살할 것”이라는 끊임없는 독살 및 피습 공포로 인해 매일 밤 극심한 불면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늘 식사 전 은수저로 음식을 찔러보고 집 밖의 작은 인기척에도 총기를 곁에 둘 만큼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괴로움을 잊기 위해 마신 잦은 음주는 그의 간을 서서히 망가뜨렸다.

결국 이웅평 대령은 간경화와 간기능부전증으로 투병하던 끝에 2002년 5월 4일, 국군수도병원에서 47세라는 젊은 나이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으나, 분단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족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남북 분단사가 낳은 또 하나의 비극적 단면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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